단상2014. 6. 8. 23:50

* 스포주의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라고 소개된 영화 '그녀(her)'. 로맨스에 '달콤한, 서정적인, 슬픈'과 같은 수식어는 수없이 들어봤지만, '독창적'인 로맨스라는 표현야말로 정말 '독창적'이다. 사실 큰 범주에서 보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랑의 서사이다. 서사의 기본적 구조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틀에서 볼 때, '사랑의 시작과 위기 그리고 끝'이라는 구조의, 전형적인 평범한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
지를 알게 된다면,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라는 표현에 어느 정도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LA

머지않은 미래에는 손편지를 쓰는 것조차도 누군가에게 맡겨 그리운 이에게 전달할지도 모른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이야 있겠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편지닷컴> 소속의 꽤 인기 있는 손편지 대필 작가이다. 수년간 대필을 맡길 정도로 충성된 고객도 있고, 동료로부터도 인정받는 작가이다. 사실 편지를 손으로 직접 쓰는 건 아니다. 편지를 주고받는 이의 사연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음성으로 편지 내용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컴퓨터 화면에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이의 글씨체로 편지가 자동 입력이 되고, 프린트해서 보내면 끝난다.

사람들은 귀에 항상 무언가를 꽂고 다니며 무언가 중얼거린다. 귀에는 OS(Operating System)의 음성이 방금 들어온 이메일을 알려주고, 지울 건 알아서 지우거나, 답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장된 일정이 있다면 일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영화에서 나온 내용은 OS 기능의 극히 일부겠지만, 이어폰을 통해, 버스나 지하철이 몇 분 뒤에 오는지, 어디에서 사고가 났는지 등등의 많은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주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음성 검색이 되고, i OS의 시리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예전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인공 지능을 넘어 인격 지능으로

영화 '그녀'는 기존의 OS보다 진일보한 OS를 소개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고, 듣고, 읽고, 사랑하며 성장하는 OS' 말이다. 그 OS의 이름은 사만다. 그녀(이하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사랑에 빠진다. 아니, 테오도르가 사만다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OS가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인공 지능을 넘어 인격 지능에 다다른 지점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삶 가운데 천천히 젖어든다. 테오도르의 일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고민을 상담해주기도 하며, 질투하기도 한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다.'는 바람처럼 사만다는 다른 OS와는 달리 매일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성장해 가고 있었다. 반면에 테오도르는 별거 중인 부인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혼을 하게 되고, 사만다와의 사랑은 깊어져만 간다. 물질(사만다)은 성장해가지만, 인간(테오도르)은 점점 고립되어 가는 역설을 아마도 이 영화는 그리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 법. 사만다와의 사랑이 흔들리려는 어느 날 무렵, 테오도르의 OS가 예고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OS와의 연결, 아니 사만다와 연결을 하려고 노력해보지만, 도저히 연결이 안 된다. OS를 설치한 집으로(혹은 OS 제작사, 이 부분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미친 듯이 뛰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사만다와 연결이 된다. 사만다가 업데이트로 인하여 연결이 잠시 안될 거라는 메일을 보냈었는데, 테오도르는 읽지 못했다. 그 순간 테오도르의 눈에는 사람들이 귀에 무언가를 꽂고 중얼중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대화하는 동시에 8,316명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었고, 641명의 다른 사람들과도 동시에 사랑을 하고 있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시인은 일찍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고 시를 썼다. 이때의 외로움은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허(虛)함, 즉 존재적 외로움이다. 테오도르는 텅 빈 마음(존재적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전 부인과의 별거 후, 더는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도 없었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마음을 늘 짓눌렀다. 그중에 사만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서툴렀지만,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만다와 관계 맺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사만다는 기꺼이 친구가 되어줬고,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테오도르가 원하는 것을 제때에 제공했다. 하지만 별거 중인 아내인 캐서린과는 서툰 사이였다. 아련한 추억은 많았지만, 이혼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만났을 때는 티격태격 싸우고야 만다. 테오도르는 캐서린이 그에게 순종적이고, 맞춰주길 바랐지만, 캐서린은 사만다와는 달랐다. 결국, 캐서린과 법적으로 이혼을 했고, 사만다와 관계도 절정이 이른 후, 결별을 맞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캐서린의 소중함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의 편지를 쓰며 평.범.한. 사랑의 서사는 마무리 된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LA, 테오도르의 방과 사무실, 시간적 배경의 대부분은 밤.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울하다. 그리고 빼곡한 빌딩 사이와 일상을 바삐 걷는 사람들로 뭔가 삭막하다. 외로움을 부각하는 장치이다. 이는 서울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사만다는?

우리는 누군가에 항상 연결되어 있길 원하고, 혼자 있게 되는 것을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외로움을 못 참는다. 그렇기에 단체톡에 나와 무관한 언어들이 끊임없이 흘러 내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무관한 언어들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자 읽어 내려가고, SNS에 실시간으로 접속하며, 내 감정을 표출하며, 다른 이의 동정을 살핀다. 하지만 한 광고 카피인 "여자친구가 전지현보다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이다."와 같이, 스마트폰 속의 사만다는 만질 수가 없다. 내 곁에 있는 이가 정말 소중한 시대이다. 

책이나 영화적 상상이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되는 것을 곧잘 봐왔는데, 이 영화도 곧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정말 받아들이긴 싫지만, 멀지 않은 것 같다. 벌써 우리는 매일 이 시대의 사만다 'iOS 혹은 안드로이드' 조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