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 10. 6. 23:58

 그림에 조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지난 9월 29일에 시간을 내어 서울 시립미술관의 폴 고갱 전시회에 다녀왔다. 특별히 폴 고갱이라는 화가를 잘 알아서도, 그리고 그림 감상에 취미가 있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를 모티브로 하여 만든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2006, 민음사)를 굉장히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허구의 문학인 소설이 그를 얼마나 비슷하게 묘사하였는지는 모르고 - 사실 알 바 아니고 -, 소설의 삶과 그의 실제 삶의 궤적이 전혀 달랐을지라도, 그 소설을 통해서 처음으로 폴 고갱이라는 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달과 6펜스」는 폴 고갱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선생이었다.


 전시회에 가기 전에 추석 연휴 기간 짧은 「폴 고갱」(2007, 마로니에북스)이라는 책도 읽어서 그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난생처음 찾는 미술관에 혼자 간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혼자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혼자는 왠지 외롭긴 했다. 그것도 너무 좋은 가을날 저녁에 말이다.



 책을 조금 읽어서 그런지 전시회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부끄럽지만, 나중에 "나, 폴 고갱 전시회 갔었어."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 구경(?)을 한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차라리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라고 말을 안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좋은 가을 저녁, 산책하고, 기분전환 한 정도로만, 그리고 그림보다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정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실 스탕달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그림 앞에서 엄청난 전율을 느껴 모든 힘이 풀리는 Stendhal syndrome 쯤은 겪어봐야, '그림을 제대로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면 그림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명한 그림이던지, 클래식 음악이라든지 그 자체에서 예술이라는 것을 느끼는 수준은 되지 못한다. 다만, 그 화가나 작곡가가 어떤 배경에서 그림을 그렸거나, 음악을 작곡했는지를 생각해보고 감상하면 뭔가 그림이 달리 보이고, 음악이 달리 들리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앞에서 언급한 「달과 6펜스」와 「폴 고갱」을 읽었던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당시에 어떤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을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면, 뭔가 그림에서 느껴지는 붓질이 새로와진다.


 달의 세상과 6펜스의 세상에서 달의 세상을 선택하여, 낙원을 그린 폴 고갱. (실제의 삶에서는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지만.) 오랜만의 기분 좋은 나들이였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3. 5. 20. 00:49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 들이 있다. (사실은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예를 들어, 예전부터 시력이 나빠서 사물이 잘 안 보인다는 느낌이 어떤 걸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시력이 나빠지고, 멀리 있는 사물이 잘 안 보이며, 멀리서 내게 인사하는 사람을 못 알아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 시력이 나빠졌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쓸데없는 궁금증이 풀리긴 했으나, 이런 궁금증은 차라리 풀리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뻔했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계기는 엉뚱하지만, 오늘 아침에 축구를 하면서였다. 조기 축구의 특성상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함께 축구를 했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뛰는 모습과 공을 차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서도 축구를 하는 기분은 과연 어떤 걸까 궁금했었다. 젊을 때처럼 잘 뛰지도 못하고, 컨트롤도 잘 안되는데도,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아침을 깨워 공을 차기 위해 운동장으로 그들을 이끈 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나도 나이가 들어 그들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내 맘대로 컨트롤이 안되는 몸을 이끌고 공을 차며, 지금은 나름대로 쉬지 않고, 공을 쫓는 체력도 나이가 들어서도 남아 있을 것인가도. 이는 도저히 나이를 먹기 전에는 풀릴 수 없는 류의 궁금증이다.

나이가 들어, 지금의 그 궁금증이 풀릴 즈음이면, 나의 청춘도 다 지났을테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며, 나의 그 시절을 회상할 생각을 하니, 지금 이 청춘을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 같았다. 흘러가는, 그리고 흘러갔던 시간이 너무 아쉽다.

나이를 들어서는 어떤 재미로, 또 어떤 재미를 기대하며 살아갈까? 어릴 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재미 - 어릴 때는 아빠가 신문이나 TV 뉴스를 재미있게(?) 보는 것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TV를 켜면 뉴스보다 만화 영화가 훨씬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 를 느끼는 지금 이 나이에 이르니, 왠지 슬퍼 졌다. 뭐, 나름의 소소한 재미 - 말초적인 것이 아닌 - 를 추구하며, 살아갈 테지만 말이다. 때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나이 들어가고 싶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3. 5. 5. 00:31

# 시기나, 계절에 따라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먼저, 신록의 계절인 5월에는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을유문화사, 2005), 4월은 - 이미 지났지만 -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문학사상, 2009)를 들 수 있다. 올해 4월에 꼭 읽으려고 했지만, 놓쳐서 이제 내년 4월까지 기다려야 할 듯.


어쨌든 계절에 따라 생각나는 책 또는 시 - 가끔 내 페북에 올렸던 - 와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도 하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물론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말이다.


#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 2010)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의 선배인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이상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라는 말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책이길래. 라는 생각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지만, 사실 별내용은 없었던 게 기억난다.


어쨌든 상실의 시대를 읽은 많은 사람은 으레 위대한 개츠비도 읽는 게 수순인 것 같다. 나는 아직 각 2권의 책을 두 번밖에 못 읽어서, 나가사와 선배와는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5월 16일에 개봉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본다면, 3번은 채우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한 편 보는 것을 책 한 권 읽는 것으로 퉁쳐주는 아량을 베풀어 준다면 말이다.


아참, 그리고 나가사와 선배의 독특한 독서 철학. 그는 죽은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는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 최근 독서는 한 달에 한 권 정도 겨우 하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요새는 책을 못 읽고, 아니 안 읽고 있다. 요새는 웹툰 <미생>에 빠져 있는데, 미생에서 삶을 배운다. 아이폰으로 보면서 중간중간 캡쳐해 놓는 컷도 많다. 다음 주 월요일에 캡쳐해놓은 사진들, 인쇄해서 책생 맡에 붙여놓을 생각이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