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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4.17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2010. 1. 6. 22:05


 다사다난했던  작년. 개인적으로 가장 극적이었던 사건을 꼽자면,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와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을 꼽을 것이다. 물론, 전자는 비극이었고, 후자는 희극이었다. 두 극적인 사건은 뭔가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이은 책이 있으니, 그 책은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이다. 사실 이 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출판된 책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 후 다시 이슈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 김은식씨는 야구 이야기를 맛갈나게 전하는 작가이다. 예전에 읽었던 그가 쓴 책인 야구의 추억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그의 칼럼은 매번 챙겨보는 편이다. 기록으로써의 야구가 아닌, 기억으로써의 야구를 가장 잘 전하는 분 같다. 그래서 이 책 읽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사실 추석 연휴 때 집에 내려가는 버스에서 이 책을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버스에서 결국 이 책은 보지 않았고, 내려가는 10시간 동안 수다만 떨면서 갔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큰 소리로 수다를 떤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우라나라 프로야구의 태생은, 사실 3S(Sex, Screen, Sports) 정책에 의한 전(全) 정권의 산물이다. 뭔가 정권의 정당성이 없으니,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김은식씨는, 한 때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했었다고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3S 정책의 산물인 야구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잠깐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모르지만, 많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세운 정권에서 프로야구를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야구팀 가운데, 호남을 연고로한 해태 타이거즈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정치적 소외된 호남에서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해태 타이거즈였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전 재산이 29만원 뿐인 분의 극진한(?) 호남사랑이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해태가 잘 나가던 시절, 정치적으로는 소외되었었고, 김대중은 대선에서 미끄러지고, 급기야 정계에서 은퇴 선언까지 했었다. 호남인들에게 도대체 김대중이란 무엇이었나. 사실, 김대중을 지지한다고해서 득이 된 것은 없었고, 돌아온 것은 폭도 취급이었고, 급기야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몰려 죽기까지 했었다.
 
31쪽 김대중은 광주, 그리고 한국민주화운동과 그렇게 뿌리 깊은 곳에서 이어졌다. 같이 웃는 사람보다 함께 울었던 사람과의 인연이야말로, 잘라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호남인들이 김대중을 지지했던 것은 함께 울었던 인연 때문일 게다. 어쨌든, 해태의 영광과 김대중의 고난은 궤를 달리했다. 당시 빙그레 이글스에 김대중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해태와 빙그레와의 경기가 있을 때, 김대중 선수가 등판했을 때는 많은 관중이 김대중을 연호했다고 한다. 그렇다. 유일하게 눈치보지 않고 야구장에서 김대중을 연호할 수 있었던 곳이 그들에게는 야구장이었다.
 
126쪽 그 시절, 그곳에서, 야구장은 수천 명이 모여 한 목소리로 외치고 흥분하고 울고 웃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곤봉과 최루탄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세는 역전된다. 결국 대통령 병에 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통령에 집착을 보였던 김대중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그 시절, 해태 타이거즈는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해체의 위기를 맞는다. IMF에서 차관을 받으며, 신자유주의의 물결도 또한 수입되어 온다. 그리고 그것은 해태의 발목을 잡는다. 사실 신자유주의보다는, 해태의 무리한 사업확장이 해태의 몰락을 가져왔다. 결국 해태는 해체되어, KIA에 인수된다. 어쩌면, 해태 팬은 김대중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해태만은 아니, 해태 타이거즈만은 살렸어야 한거 아닌가 하는. 책에서는 이 사건을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의 바톤 터치로 명명하며 "김대중이 해태 타이거즈를 죽였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시절 무등 구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 책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올 해 또다시 바톤 터치가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와 KIA 타이거즈의 우승이 그것이다. 사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께 죄송한 일이지만, 타이거즈와 김대중은 공생할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책을 덮고, 이렇게 해태를 추억하는 책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여전히 오르내리는 팀. 최근 어떤 기사에서는 만약 당시 해태의 우승보다, 삼성 혹은 두산이 우승했었더라면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해태가 강조한 것은 오로지 투지, 하지만 삼성, OB는 당시에 드문 선진 시스템과 투자가 있었는데, 만약 두 팀이 우승했었다면 프로야구의 트렌드가 그쪽으로 흘러갔을테지만, 해태의 변함없는 우승으로 투자없는 투지만 강조되었다는 점을 아쉬워 했다. 하지만 프로야구의 이야기거리는 풍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태의 변함없는 우승은 프로야구의 재미를 반감시켰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후반부에 쌍방울 레이더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중 인상적인 글귀가 있다.
 
174쪽 흘러간 것을 소홀히 하는 이들은 다가올 시간들 역시 치열하게 임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기억하는 방식 역시 한국 프로야구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한 가지 척도가 될 것이다.
 
 쌍방울은 누구도 떠맡지 않으려는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이다. 안타깝지만, SK가 쌍방울을 인수한게 아니라, 해체 후, 재창단을 했기 때문에, 쌍방울은 주인없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실 KBO에서 신경써서 관리해야 하는 문제인데.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이게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현주소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야구와 정치, 현대사를 골고루 알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글쓴이의 글 재주 덕분에 책이 더욱 풍성해진 것 같다. 이런 류의 책이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
 
 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 하지만 추운 것 보다 역시 겨울이 안좋은 점은, 야구가 없어서이다. 빨리 야구 개막했으면 좋겠다.
 
 
 
244쪽 뒤돌아보자면 경제학자들의 계산보다 26년쯤 일렀던 프로야구의 출범, 그것은 항상 '의지'로써 '조건'과 '배경'을 앞지르고 선도했던 한국사회 역동성의 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 '의지'가 흐려지는 순간에도 버텨나갈 자생력을 결여한 불완전성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
카테고리 취미/스포츠
지은이 김은식 (이상미디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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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09. 4. 17. 15:17
해태 타이거즈, 아~그 무시무시했던 이름이여!


[화제의 책]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


빙그레 팬에게 해태란


1987년. 오로지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전기기까지 모조리 삼성제품으로 도배한 집안에서 유년기를 보낸 빙그레 이글스의 어린이 회원이었다. 반 아이들이 파란색 삼성 잠바를 입고, 포항 아톰즈 마크가 새겨진 축구공을 갖고 다닐 때 홀로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빙그레 잠바를 입고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2년 후 가을, 빙그레의 어린이 회원은 " 꼴찌 응원해서 좋겠다 " 던 반 아이들을 실컷 약 올려준 후, 웃음을 빙그레 머금은 채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고, 마치 신성한 행사라도 치르듯 '우리집 라면'을 끓여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꽃게랑'을 손에 쥐고, 삼성전자에서 생산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정말 우승할 것'만 같았다. 마치 '진짜 타격의 신의 모습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듯 이강돈은 1회말, 다른 누구도 아닌 선동열의 공을 받아쳐 담장 한가운데를 넘겨버렸다. 그 무시무시하고 징글징글하고 너무나 너무나 짜증스러웠던 해태를, 이번에는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어진 네 경기에서 빙그레는 내리 졌다. 도대체 이 놈의 해태라는 팀에는 무슨 천사라도 들러붙은 건지, 선동열을 넘어서도 문희수가 있었고, 김정수가 있었고, 김성한이 있었고, 장채근이 있었고, 한대화도 있었고, 이순철도 있었다. 팀 창단 후 92년까지 무려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빙그레는, 그때마다 번번이 해태를 만나(92년은 롯데 자이언츠) 맥없이 패했다. 이건 정말이지, 호랑이와 독수리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고양이와 병아리의 먹이사슬 관계였다.

▲선동열은, 정말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선동열 팬사이트 선동열닷컴


해태를 본격적으로 증오하게 된 계기는 91년 한국시리즈였다. '시속 145㎞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투수(아마도 87년 빙그레 이글스 어린이 팬북에 이렇게 설명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송진우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한국시리즈 퍼펙트 기록달성이 해태 때문에 깨졌다. 빙그레는 역시나 맥없이 패했고 당연히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의 차지였다.


그저 신생팀이라는 이유만으로 빙그레를 응원했던 마음 여린 초등학생에게 당시 해태란 '왜 인간은 타인을 증오하게 되는가'라는 따위의 철학적 고민을 안겨줬던 선동열을 보유한 팀이었고, '어떤 거짓말을 해야 떡볶이 사먹을 돈을 받아낼까'하는 따위를 고민하던 아이에게도 '프로야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력 평준화가 필수적'이라는, 가히 하일성 뺨칠 정도의 문제의식을 안겨줬던 팀이었다(아마도 80~90년대 빙그레 이글스와 마찬가지로 해태 앞에서는 호랑이 앞의 고양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나 꼴찌를 도맡았던 인천 야구 팬들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91년 한국시리즈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야구경기를 볼 힘을 잃어버린 초등학생은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벗고 고향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스틸야드로 달려가 검정색에 붉은색 줄무늬가 수놓인 유니폼을 입고 뛰는 이기근과 나승화를 응원했다. 롯데와 OB의 한국시리즈가 열린 95년, 옛날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스틸야드에서 황선홍과 라데가 선보이는 환상적인 경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8~90년대 당시 해태란, 야구를 좋아하던 초등학생을 축구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팀이었다. 해태와 포스트시즌에서 맞붙는 팀의 팬에게는 축제를 고통의 나날로 가득 채워준 증오의 대상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란

▲ <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 김은식 지음(이상미디어). ⓒ프레시안


<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 은 아마도 해태를 마주한 빙그레 팬의 한숨 정도는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려버릴 정도로 한을 쌓아왔음이 틀림없는, 삼미-청보-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인천 야구 팬이 쓴 책이다. 저자 김은식은 CBS 라디오 < 파워스포츠 > 에서 80~90년대 한국 프로야구 스타들을 재조명한 '야구의 추억'을 방송했고, 인터넷 포털에 같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묶어 역시 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제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언급돼 있지만 그는 군사독재에서 민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로 이어지는 20세기말 질곡의 한국사를 설명하는 하나의 코드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책의 중심은 과거 한국프로야구 최강의 팀이었던, 보다 정확하게는 책에 나온 설명대로 '최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해태 타이거즈다.


97년까지 해태의 홈 유니폼이었던 그 촌스러운 붉은색 상의-검정색 하의 콤비는 제대로 된 팀 구성원도 채우지 못하고 출범했음에도(82년 출범당시 해태 타이거즈 선수는 14명에 불과해 김성한이 선발투수로도 뛰어야 했다. 그는 프로야구 첫 시즌 10승을 거뒀다) 강자들을 차례로 거꾸러뜨린 악바리 야구의 상징이었다.


책의 설명을 빌리자면 아마도 세계 정치사를 통틀어도 그만큼 애절하고 처연한 별명이 없을 '인동초'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해태의 촌스러운 유니폼은 80~90년대 영남 정권 하에 이어진 온 국민적 '왕따'에 숨죽이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나가야만 했던 호남 사람들의 설움과 한의 상징이었다. 해태의, 정말 노골적으로 새빨갛던 상의와 칙칙한 검정색 하의로 이뤄진 유니폼은 96년 당시 정부적 차원에서 부르짖던 '선진사회'와는 담을 쌓았으나, 그러면서도 기아에 허덕이던 빈국을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주역이었던 가난한 노동자들이 흘린 땀의 상징이었다.


책은 이처럼 '최강이면서도 약자들의 팀이었던' 역설적 팀 해태 타이거즈를 핵심 키워드로, 또 해태와 함께 광주의 눈물을 상징하던 김대중을 부수적 키워드로 삼아 민주화와 군부독재, 경제 선진화와 외환위기라는 모순된 시공간으로 존재했던 8~90년대 한국사회를 차근차근 넘어간다. 따라서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최강팀 해태가 승리한 날 경기장에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지던 < 목포의 눈물 > 이 해태의 응원가가 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해태는 농촌의 부모가 소 팔아 키운 돈으로 공부한 시골학생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게 가능했던, '민주택시운전기사'들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초들이 민주화의 열망을 가졌고 실제 이를 이뤄낼 수 있었던 시절을 상징하는 팀이었던 셈이다. 해태는 그 모순된 시절의 시대정신이었다.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고 다니던 초등학생이 목놓아 응원했음에도 당시 시대정신을 품지 못한 빙그레가 해태를 넘어설 수 없었음은 따라서 당연했다. 고양이와 병아리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직접 흘린 피로 민주화를 이뤄낸 대한민국 서민과 독재정권의 싸움이랄 정도로 승부가 빤했기 때문이다.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이선희 등 그 시절에도 최고 스타를 보유했던 삼성이나 '왕년에 미국을 주름잡았다던' 박철순을 거느렸던 OB, 일본야구를 평정했다던 백인천을 가졌던 MBC마저 해태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오고 해태는 가고


그랬던 해태의 영광의 시절은 97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98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외환통장이 이미 바닥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차관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됐다.


서민 신화의 끝이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징글맞던 해태 야구가 더 이상은 먹히지 않는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공교롭게도 프로야구 8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쓰러진 두 구단이 바로 호남을 연고지역으로 삼았던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해태는 쌍방울과 마찬가지로 주축선수를 모조리 타구단에 팔아넘기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김응용 감독의 말처럼 "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갔다 " . 처음부터 돈 먹는 하마로 출발했던 한국프로야구 시스템에서 열악한 재정 상태에 놓인 해태의 근성은 더 이상 발휘되지 못했다.


정말 역설적이게도 호남의 상징 김대중이 위기 극복의 기법으로 퍼뜨린 신자유주의 세례를 호남 서민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아니, 한국의 어떤 서민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싸우던 서민의 시대가 저물면서 해태는 사라졌고, 뒤를 이은 기아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해버렸다.


호랑이가 사라진 왕좌는 외환위기를 견뎌낸 다른 공룡들의 차지였다. 선진야구 시스템이라던 자유계약선수제도(FA)가 도입되면서 돈다발을 가진 팀이 곧 승리를 독식하는 시대가 됐다. 빙그레 못지않게 해태 앞에서는 비운의 팀이었던 삼성은 돈으로 스타들을 쓸어담으며 21세기 초 최강팀이 됐다. 역시나 역설적이게도 삼성의 전성기는 옛 해태 전성기 주축을 이뤘던 김응용, 선동열, 한대화, 조계현, 임창용 등이 열었다.


심지어 마치 고양이 앞의 병아리만 같았던 빙그레마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한화의 이름으로). 그러나 기아는 외환위기 사태 이후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 새빨갛던 홈 유니폼이 원정 유니폼으로 바뀐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다.


그 옛날 검정색 바탕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고 다니던 초등학생은 외환위기 직후 대학생이 됐다. 무시무시함의 상징이었던 그 새빨간 유니폼을 마치 한 때는 지구를 호령했으나 이제는 화석으로 변한 공룡의 뼈를 보듯 가볍게 넘길 정도로 기억이 희미해진 대학생은 성인식을 치르며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어느새 놀라우리만치 세련된 경기장, 호쾌한 플레이가 넘실대는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 메이저리그의 팬이 된 채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다 읽은 후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한 스포츠 케이블 방송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가 중계됐다. 마치 텍사스 레인저스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모자를 눌러쓴 채, 새빨간 원정 유니폼을 입은 서재응이 호투했으나 결국 기아는 패했다. 끝내기 안타를 친 강민호가 클로즈업된 뒤로 덕아웃에서 고개 숙인 기아 선수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강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을 추억하게 된 것이. 그 무시무시했던 해태를 다시 떠올린 것이.


이대희 기자 (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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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꼭 본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