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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
  2. 2009.05.10 농담의 나비효과
2011. 3. 24. 19:0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뭔가 우리 인간의 존재를 다룬 철학적인 책인 듯, 제목은 말하고 있지만, 사실 철학책은 아니다.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소설책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에 대해서 한꺼풀 더 벗겨지는 그런 느낌이다. 예전 그의 소설 농담을 읽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인간의 뭔가 밝히기 꺼려 하는 약한 그런 속마음을 그는 거부감이 덜 들도록 글을 쓰는 듯한, 개인적인 느낌이다.
 
 존재의 무게
 
 존재에도 무게가 있을까? 사실 무게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무겁다, 가볍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게를 재는 우리의 관념에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 할 수는 없지만, 가볍고 무거운 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다 동의할 것이라는 가정을 먼저 해야 했을 것 같다.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우리의 존재. 이러한 제목의 책도 있더라지. 두꺼운 삶과 얇은 삶. 이 책에서는 일단 주인공인 테레사와 토마스를 통해 가볍고 무거운 삶을 조명한다.

 

 이 두 사람은 우연에 대해서도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다. 우연을 불쾌히 여기는 남자, 우연의 주술성을 믿는 여자. 여러 우연은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했고, 그 우연은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했던 <그래야만 한다!>는 필연으로 가장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만난 그 둘은 사랑을 하게 되고, 정말 가볍고 약한 테레사는 토마스라는 전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토마스에게는 두 여인이 있다. 토마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토마스가 필요한 사람. 이 두 사람은 또한 삶에 대해 가볍고 무거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표상이다. 당연히 토마스의 사랑에는 가볍고, 무거운 사랑의 이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랑의 무게뿐만 아니라, 처음엔 약하고 가벼웠던 테레사 또한 점점 토마스만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그의 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의 포인트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또한 가볍고 무거운 것은 사람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체코의 정치적인 상황을 비추어 볼 때, 밀란 쿤데라는 분명 체코의 참을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가벼움도, 이 책에 녹이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인 토마스는 정치적인 선택에서도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약자로, 신념에 대해서 비굴함을 강요받기도 한다.
 
257쪽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는 가볍고도, 무겁운 존재가 혼재해 있다는 것이 결론인 것 같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이 존재가 가벼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를 의지 하지 않고서는,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약하디 약한 우리의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

 

 이 책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결말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인 테레사와 토마스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뒤엉킨 시간으로. 음 그러니깐 이러한 구성을 액자 구성이라고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 같다. 읽는 독자는 이미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어 알지만, 이야기 속의 이야기의 결말은 그들의 존재에서 끝나기 때문에, 먹먹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서,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한번 더 읽고 싶은 책이다. 아오. 나도 리뷰 잘 쓰고 싶은데.

 

 여담인데, 예전에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의 야나체크 편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을 살짝 보여 준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야나체크의 음악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사용된 야나체크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 때, 진행자가,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참을 수 없는 흥분의 무거움이라고 이야기 한다고도 했다. 또한, (교양있는) 우리는 야한 영화를 볼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11쪽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15쪽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초벌그림>이란 용어도 정확지 않은 것이, 초벌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36쪽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59쪽 그런데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의해 좌우될수록 보다 중요하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나 않을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다는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169쪽 영혼을 흥분시키는 것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행동하는 육체에 의해 배신당하는 것, 그리고 이 배신을 목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40쪽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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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09. 5. 10. 23:2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의 제목은 한번 쯤 들어보셨으리라. 너무 유명하고, 이 제목을 패러디한 다른 제목도 많은 것 같다. 음. 그리고 영화화도 되었다고 한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쓴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이 최근에 읽은 농담이다. 어느 날 부터 였나, 도서관을 거니는데, 계속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애써(?) 외면을 했었는데, 그냥 뭐랄까, 왠지 나에게 읽히기를 원했던 책이라 생각해서, 시험 끝나기 하루 전에 빌려서 읽게 되었다. 시험 기간동안에는 두꺼운 전공 서적만 보다가, 민음사의 아담한 책을 보니 뭔가 끌렸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처음 읽는 체코 출신 작가의 책. 뭔가 이름에서부터 풍기는 문학적 향취. 어쨌든, 내가 아는 작가의 이름 중에서 가장 멋진 것 같다. 참고로 폴 오스터도 내가 좋아하는 이름 중의 하나이다. 음. 어쨌든, 요즘 이 책을 자주 들고 다녔었는데, 기숙사 후배가 이 책을 보더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예전에 읽었었는데, 어려웠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던 참이었는데, 사실 나도 집중이 잘 안되고, 뭔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일단 그 이유로, 글씨가 작아서(?). 음. 그리고, 이 책의 스타일을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책에 너무 많은 ""가 나와서 헷갈렸다. (책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아마 이 책에서 나온 1인칭 화자가 4명 이었던 것 같다. 한 장에 한명씩 화자가 바뀌었다. 마지막 장에는 3명의 화자가 한꺼번에 나와서,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보니, 보통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정신 세계를 투영된 인물이라고 하는데, 한 소설에 4명의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겹치지 않게 서술한 작가의 능수능란함이랄까. 이런게 돋보였다.

 

 이 책에는 일단 4명의 화자가 나오지만, 모든 이야기에 동시에 등장하는 사람은 루드빅뿐이다. 루드빅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정치적인 내용과 사랑, 복수의 내용이 잘 버물려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패한 복수이지만. 주인공 루드빅의 대학 시절, 그가 좋아했던 여자 동지(마르케타)에게 쓴 엽서의 내용이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이 엽서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 회부되고,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농담이었다고 변호하지만, 공산당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엔 정치범으로 강제로 탄광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첫눈에 반한 루치에를 만나게 된다. <100쪽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잘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를 만나 순수한 사랑을 이어가던 중, 결국 어느 순간 그의 남성이 꿈틀거려, 결국 그녀와의 하룻밤을 묵고자 했으나, 루치에의 완강한 거부로 결국 둘은 헤어지고, 루치에는 그 곳을 떠난다. 루드빅은 후회한다. 그녀를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운명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루치에는 루드빅의 고향이었던 곳으로 가게된다. 그곳에서 루치에 코스트카를 만나 자신의 과거(성폭행을 상습적으로 당했던)를 이야기했고, 코스트카에게 마음을 연다. 결국 자신의 과거 때문에, 즉 처녀성이 없다는, 루드빅을 거부했었는데, 코스트카를 만나 루치에는 변화되었고, 코스트카와 잠을 자게 된다. 나중에 루드빅은 코스트카와의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자신이 루치에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루치에의 마음을 열게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루드빅은 자신의 정치 재판 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지 알았던 제마넥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복수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어느 날 루드빅의 부인이었던 헬레나를 만나게 되는데, 루드빅은 그녀가 제마넥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은근하게 헬레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성공하고 헬레나와 잠을 자게 된다. 헬레나는 루드빅을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루드빅은 헬레나를 복수의 도구로만 사용했었다. 제마넥이 사랑하는 헬레나의 육체를 경험함으로써, 그에게 복수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헬레나와 제마넥은 법적으로만 부부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제마넥은 젊은 여학생과 사귀고 있었다. 루드빅이 볼 때에도 매혹적인. 어쨌든 자신의 복수가 실패했음을 알고, 헬레나를 떼어놓으려고 하지만, 헬레나는 루드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396쪽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결국 루드빅은 차갑게 돌아섰고, 헬레나는 자실을 기도하게 된다. 입에 진통제를 털어 넣었지만, 그것은 진통제 통에 들어있던 변비약이었다. 결국 그 변비약이 헬레나를 구했고, 급히 헬레나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루드빅과 화장실에서 창피한 모습으로 재회한다. 소설 속 인물인 헬레나는 창피했겠지만, 책을 읽는 나는 뭔가 "풉"하는 웃음이 세어나왔고, 이거 뭔가 시트콤 같은 상황인데?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밀란 쿤데라식의 유머인지는 몰라도, 뭔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마 소설을 읽는 묘미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소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읽다 보니 어느새 술술 읽게 되었고, 예비군 훈련 가기 전날, 새벽 3시까지 이 책을 완독했다. 사실 5월 5일 어린이 날때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랬는지, 잠을 쉬이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끝까지 읽어보자." 하고, 새벽까지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이 책 덕분에, 3시에 잠들어, 5시 30분에 일어나서, 씻고, 여섯시 반 경에 학교로 갔다. 음. 이 여파가 훈련때는 없었는데, 다음 날 수업시간에 나타나, 결국 수업시간 내내 졸았던.

 

 농담. 결국 사소한 농담이었지만, 농담이 루드빅의 인생의 행로를 결정, 아니 바꿔버렸다. 이 책을 읽으니, 예전에 보았던 영화 에쉬튼 커쳐 주연의 나비효과가 생각났다. 결국 인생을 바꾸는 것은 사소한 것 때문이다. 혹시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 앞으로 짧게는 며칠 후, 길게는 몇 십년 후의 인생이 결정된다하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결국 자기탓이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같은 소설을 읽은 후의 나의 농담같은 리뷰.

 
73쪽 서로가 다 초면이고 익명인 불투명함 속에서 타인들에게서 거칠고 낯설기만 한 모든 것이 가차없이 발산된다. 우리를 묶어주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인간적 연결 고리란, 짤막하게 서로 무어라 추측이나 해보고 있던 불투명한 미래뿐이었다.
  
 
77쪽 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 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은 결코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나,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던 것이다.

 

259쪽 여자의 생각을 다루는 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이성으로 여자를 설득하려 하거나, 아주 합리적은 근거를 들어 여자의 의견을 반박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미지(원칙이나 이상, 신념 같은 것)를 파악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녀의 행동과 그 이미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궤변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391~392쪽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98~399쪽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

농담(세계문학전집 2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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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