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2009. 2. 14. 15:20

샤르트르(J.P.Sartre)


 
나의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죽음은 타자들의 것이다. 나의 죽음은 나를 판단하는 타자의 의식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나의 삶에 부여해준다. 따라서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들의 먹이감이다.

 샤르트르가 했던 이야기인데, 음.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고서 메모한 내용이다. 최근 많은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이 메모가 떠올랐다. 용산 참극, 강호순 사건, 그리고 최근 화왕산 억새제에서의 안타까운 죽음.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란 없다. 작년에는 안재환, 최진실의 죽음. 하나 같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죽음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고 실망스러움을 많이 느꼈다. 연예인의 자살이 보도 되었을 때는, 이와 관련한 법을 입법해야 한다, 아니다 라는 주장으로 대립각을 이루었고, 용산 참극 또한 마찬가지로 정당한 수단이었다며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권을 향한 공격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최근 또 괴상한 뉴스를 접했는데, 강호순 사건을 적극 이용해 용산 참극을 무마하라는 여론몰이 이메일 지시를 청와대 직원이 보냈다라는 정말 어이 없는 뉴스를 모두 보았을 것이다. 정말 이런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궁금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자의 행패를 부린 것이다. 분명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언론에 밝혀 진 것이 전부가 아닐테니.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속아 왔을까, 혹은 모르고 지내왔을까.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에는 이탈리아 아기의 일화가 나온다. 이 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구조대원이 손을 쓰지 못하는 동안 이탈리아 전체가 아이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시시각각 발표되는 속보에 귀를 귀울였다. 그 사이에 레바논 사람들은 꾸준한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난리 가운데에서도 우물에 빠진 이탈리아 아이의 운명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바로 몇 마일 옆에서 사람들이 전쟁과 테러가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데도, 베이루트 기독교 지구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이탈리아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가 구출되자 기독교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숫자다."란 말을 했다. 테러보다는 환경 재앙이 사람의 목숨을 더 많이 앗아가지만 우리는 테러에 더 분노를 한다. (이것도 또한 블랙 스완에 나온 내용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의 경중(輕重)을 은근히 따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부끄럽지만 최근 용산 참극으로 인한 시민들의 죽음에 다른 뉴스보다 더 크게 분노 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있는 자의 행패는 이제 그만 부려야겠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