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3. 22:18

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점심을 먹고, 기형도 시집을 펴서 읽는데, 진눈깨비가 나왔다. 그리고 창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19년만에 4월의 서울 하늘에 내린 눈이란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