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2010. 4. 28. 23:33

# 자연은 참 부지런하다. 올해만은 올 것 같지 않던 봄이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겨우내 유난했던 추위를 이겨낸 나무들은 어느새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 꽃을 피우는 이 계절. 참 좋다. 그리고 감사하다. 아니, 감사해야한다. 이렇게 좋은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음에.

 

# 봄이다. 봄 하면 생각나는 꽃은 벚꽃, 개나리, 진달래인데, 그 꽃들의 향을 코를 가까이하고 맡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 꽃들을 지나갈 때 향이 났던 것 같지는 않다. 반면에 아카시아를 지나갈 때는 아카시아 내음이 주위를 둘러쌈을 느낀다. 그래서 봄 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꽃이 아카시아이다. 나는 후각에 민감한 사람인가보다. 그리고 봄 특유의 비 온 후 젖은 나무에서 나는 내음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 학교 가는 길에 아카시아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전교생 20여명 남짓의 초미니 학교였는데,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20분 정도를 걸었던 것 같다. 그것도 지름길로 갔을 때 20분이지, 비가 많이 와서 지름길에 있는 보가 넘칠 때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는데, 그 길에서 아카시아 향을 맡을 수 있었다.

 

# 어린 시절. 산골에 살았던 시절. 그 때는 순수한 산골 소년이었다. 마을을 둘러 싼 산을 넘어가면 아라비아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미국이 나오는 줄 알았던.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순수함 혹은 멍청함. 어쨌든 나는 그런 아이였다. 오락실은 나쁜 곳이라는, 불량학생들만 가는 곳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중 2 때까지 오락실에 한번도 안갔다. 친구들이 오락실에서 놀 때, 나는 밖에서 시간을 떼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오락실 동전 노래방에서 상주(?)하면서 친구와 놀았을 정도였는데. 아마 어린 시절부터 나의 이런 재미없는 성격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 성시경의 노래 중에 1학년 1반 이라는 노래가 있다. 첫 가사가 " 가끔 유난히도 그리운 날들. 코끝에 맴도는 푸른 봄날의 향기. 싱그러운 라일락 기다리는 설레임. 기억에 입가엔 미소가. 혹 비라도 내릴까 내 어린 맘에 잠을 설치던. 이제는 아련한 소풍 전날의 추억. 깨우지 않아도 젤 먼저 잠을 깨던 철부지 일학년 일반 내 모습 참 그리워." 로 시작하는데, 나도 가끔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고 고향이 무척 그리울 때가 있다. 언제였나, 정말 유난히도 고향에 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가면 되지 왜 유난을 떠는지 말하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이제 더는 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살면서도 본의 아니게 고향을 잃어버리는 흔치 않는 그런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우리 동네에 댐이 건설되면서 고향을 잃어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고향에 가본적이 없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구나. 어린 시절에는 산골 생활을 청산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철 없는 생각이었고, 가슴이 저밀 정도로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련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특히 외로울 때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다.

 

# 집 앞에 흐르던 여우라는 이름의 냇가(여우내).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냇가의 물이 흘러 넘칠 정도로 물이 불어났고, 며칠 동안 가물면 금새 물이 흐르지 않은 냇가 아닌 냇가가 되어 생긴 이름이다. 여우같다고 해서.

 

 한 여름의 어느 날 새벽.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세상 모르고 가족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에 우리 집 앞에서 우리 가족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서 온 가족이 잠에서 깨어, 문을 열고 나갔는데, 왠 걸, 여우내가 흘러 넘쳐 물이 집 앞마당, 마루까지 물이 차 올랐다. 물살을 헤치며 그나마 높은 지대로 온 가족이 대피를 했더랬다. 비가 조금만 더 왔더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찔한 기억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이는 아마도 댐 건설로 인해 산허리가 무분별하게 잘려 나가는 등, 자연의 복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집 앞마당에는 텃밭이 있었다. 감나무, 옥수수, 고추, 고구마 등을 키웠었고, 울타리는 무궁화 나무와 은행나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함에 다시 한번 내 기억력에 감탄(?)을 해본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 즈음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답지 않다. 댐 건설로 인해 산 허리의 나무들이 잘려나갔고, 외지인들의 보상금을 노린 투기, 그리고 산골에 살아야만 했던 한창 놀 시기의 답답함.

 

# 봄 이야기를 하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꽃 피는 진짜 봄이 오려나 했다. 이번 주말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적당했던 토요일엔 야구장엘 다녀왔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남산에 다녀오려 했으나, 남산을 수면보충에 양보했다. 저녁 예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왜 이런다니. 올해 겨울은 아직도 유난을 떨고, 봄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