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여름에 읽어야 제맛(?) 이라며 이 책 읽기를 여름이 되기까지 주저해왔다. 결국 무더운 7월달에 이 책을 집어 들어 읽었다. 그리고 리뷰를 쓰려고 하는 지금은 9월 초.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앞으로는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겠다. 음. 하지만 지금 리뷰가 밀린 책이 벌써 몇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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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쪽 아무리 부지런해도 먹이를 찾을 때에는 홀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개미처럼, 혹은 진리를 찾으려고 소요하는 옛날 희랍의 철학도들처럼, 혹은 새벽의 숲속에서 날쌘 사슴을 뒤쫓는 사냥꾼처럼 지금 새벽 같은 대학 캠퍼스의 젊음들은 방황해도 좋다는 겁니다. 괴테도 말했습니다. 노력할수록 방황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93쪽 비범한 것을 평범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세렌디피티란 존재하지 않지요. 단지 평범한 것도 비범하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과 눈을 지닌 사람에게만 우연이나 실수까지도 행운이 되는 세렌디피티의 가능성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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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의 제목은 한번 쯤 들어보셨으리라. 너무 유명하고, 이 제목을 패러디한 다른 제목도 많은 것 같다. 음. 그리고 영화화도 되었다고 한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쓴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이 최근에 읽은 농담이다. 어느 날 부터 였나, 도서관을 거니는데, 계속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애써(?) 외면을 했었는데, 그냥 뭐랄까, 왠지 나에게 읽히기를 원했던 책이라 생각해서, 시험 끝나기 하루 전에 빌려서 읽게 되었다. 시험 기간동안에는 두꺼운 전공 서적만 보다가, 민음사의 아담한 책을 보니 뭔가 끌렸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처음 읽는 체코 출신 작가의 책. 뭔가 이름에서부터 풍기는 문학적 향취. 어쨌든, 내가 아는 작가의 이름 중에서 가장 멋진 것 같다. 참고로 폴 오스터도 내가 좋아하는 이름 중의 하나이다. 음. 어쨌든, 요즘 이 책을 자주 들고 다녔었는데, 기숙사 후배가 이 책을 보더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예전에 읽었었는데, 어려웠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던 참이었는데, 사실 나도 집중이 잘 안되고, 뭔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일단 그 이유로, 글씨가 작아서(?). 음. 그리고, 이 책의 스타일을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책에 너무 많은 "나"가 나와서 헷갈렸다. (책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아마 이 책에서 나온 1인칭 화자가 4명 이었던 것 같다. 한 장에 한명씩 화자가 바뀌었다. 마지막 장에는 3명의 화자가 한꺼번에 나와서,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보니, 보통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정신 세계를 투영된 인물이라고 하는데, 한 소설에 4명의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겹치지 않게 서술한 작가의 능수능란함이랄까. 이런게 돋보였다.
이 책에는 일단 4명의 화자가 나오지만, 모든 이야기에 동시에 등장하는 사람은 루드빅뿐이다. 루드빅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정치적인 내용과 사랑, 복수의 내용이 잘 버물려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패한 복수이지만. 주인공 루드빅의 대학 시절, 그가 좋아했던 여자 동지(마르케타)에게 쓴 엽서의 내용이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이 엽서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 회부되고,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농담이었다고 변호하지만, 공산당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엔 정치범으로 강제로 탄광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첫눈에 반한 루치에를 만나게 된다. <100쪽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잘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를 만나 순수한 사랑을 이어가던 중, 결국 어느 순간 그의 남성이 꿈틀거려, 결국 그녀와의 하룻밤을 묵고자 했으나, 루치에의 완강한 거부로 결국 둘은 헤어지고, 루치에는 그 곳을 떠난다. 루드빅은 후회한다. 그녀를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운명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루치에는 루드빅의 고향이었던 곳으로 가게된다. 그곳에서 루치에 코스트카를 만나 자신의 과거(성폭행을 상습적으로 당했던)를 이야기했고, 코스트카에게 마음을 연다. 결국 자신의 과거 때문에, 즉 처녀성이 없다는, 루드빅을 거부했었는데, 코스트카를 만나 루치에는 변화되었고, 코스트카와 잠을 자게 된다. 나중에 루드빅은 코스트카와의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자신이 루치에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루치에의 마음을 열게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루드빅은 자신의 정치 재판 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지 알았던 제마넥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복수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어느 날 루드빅의 부인이었던 헬레나를 만나게 되는데, 루드빅은 그녀가 제마넥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은근하게 헬레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성공하고 헬레나와 잠을 자게 된다. 헬레나는 루드빅을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루드빅은 헬레나를 복수의 도구로만 사용했었다. 제마넥이 사랑하는 헬레나의 육체를 경험함으로써, 그에게 복수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헬레나와 제마넥은 법적으로만 부부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제마넥은 젊은 여학생과 사귀고 있었다. 루드빅이 볼 때에도 매혹적인. 어쨌든 자신의 복수가 실패했음을 알고, 헬레나를 떼어놓으려고 하지만, 헬레나는 루드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396쪽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결국 루드빅은 차갑게 돌아섰고, 헬레나는 자실을 기도하게 된다. 입에 진통제를 털어 넣었지만, 그것은 진통제 통에 들어있던 변비약이었다. 결국 그 변비약이 헬레나를 구했고, 급히 헬레나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루드빅과 화장실에서 창피한 모습으로 재회한다. 소설 속 인물인 헬레나는 창피했겠지만, 책을 읽는 나는 뭔가 "풉"하는 웃음이 세어나왔고, 이거 뭔가 시트콤 같은 상황인데?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밀란 쿤데라식의 유머인지는 몰라도, 뭔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마 소설을 읽는 묘미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소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읽다 보니 어느새 술술 읽게 되었고, 예비군 훈련 가기 전날, 새벽 3시까지 이 책을 완독했다. 사실 5월 5일 어린이 날때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랬는지, 잠을 쉬이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끝까지 읽어보자." 하고, 새벽까지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이 책 덕분에, 3시에 잠들어, 5시 30분에 일어나서, 씻고, 여섯시 반 경에 학교로 갔다. 음. 이 여파가 훈련때는 없었는데, 다음 날 수업시간에 나타나, 결국 수업시간 내내 졸았던.
농담. 결국 사소한 농담이었지만, 농담이 루드빅의 인생의 행로를 결정, 아니 바꿔버렸다. 이 책을 읽으니, 예전에 보았던 영화 에쉬튼 커쳐 주연의 나비효과가 생각났다. 결국 인생을 바꾸는 것은 사소한 것 때문이다. 혹시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 앞으로 짧게는 며칠 후, 길게는 몇 십년 후의 인생이 결정된다하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결국 자기탓이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같은 소설을 읽은 후의 나의 농담같은 리뷰.
259쪽 여자의 생각을 다루는 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이성으로 여자를 설득하려 하거나, 아주 합리적은 근거를 들어 여자의 의견을 반박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미지(원칙이나 이상, 신념 같은 것)를 파악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녀의 행동과 그 이미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궤변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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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라는 연어. 나도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음. 왠지 이런 생각하니 서글퍼지네. 어쨌든 어른 위한 동화라는 말에는 모순이 있긴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는 나를 위한 동화인 느낌이 들었다. 참고로 동화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이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던 안도현 시인. 시인이 쓴 문장들이라서 그런지, 섬세하고 예뻤다. 이야기를 읽는 기쁨 외에, 예쁜 문장들을 읽는 기쁨도 있었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에 지루하지 않게(?) 연필로 휙휙 그린 듯한 그림들도 좋았다.
이 책에서의 사건(?)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한가지 사건은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의 사랑이다. 고작 연어들의 사랑이야기이지만, 괜스리 설레였다. 예쁘고 아기자기하고 맑은 그런 사랑인 느낌이다. 그리고 다른 사건은, 폭포앞에서 다른 연어들이 쉬운 길로 가려고 할 때 주인공인 은빛연어는 쉬운 길보다는 꼭 가야 할 힘든 길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 힘들게 폭포의 사나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던 일이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모습을 보고 쉬운길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연어를 읽는 내내, 이름이 비슷한 연아가 생각이 났다. 이건 뭐지. 어쨌든, 연어의 어에 점 하나를 지우고 옆으로 다시 찍으면 연아의 아가 된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연아와 연어의 공통점을 찾자면, 연어는 거센 물결을 헤쳐 올라가고, 연아는 중력의 힘을 거슬러 올라가는(점프하는) 것. 아마, 연어도 연아도 자신을 무력화 시키는 것들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다른 점이 있다라면, 연어는 힘겹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자신의 생을 마감하지만, 연아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점프를 하고서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다는 것.
11쪽 연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연어를 옆에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눈,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상상력은 우리를 이 세상 끝까지 가보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입맞춤이 뜨겁고 달콤한 것은, 그 이전의,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까지의 상상력 때문인 것처럼.
39쪽 그리움, 이라고 일컫기엔 너무나 크고, 기다림,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넓은 이 보고 싶음. 삶이란 게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도 또한 견뎌내야 하는 거래지만, 이 끝없는 보고 싶음 앞에서는 삶도 무엇도 속수무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