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7. 22:15

 실의에 빠져있을 때 읽기 시작 했던 책.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꼭 나는 소유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창 했었을 때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계기는 신문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일전에도 쓴적이 있지만, 일단 소유냐, 존재냐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싫지만, 대게, 소유와 존재는 나눠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실례들을 책의 앞부분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만 재밌었고, 나머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대충 읽은 것 같다.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라는 내용에서는 우리들이 평소에 쉽게 하고 있는 소유지향적인 생각들을 짚고 넘어간다. 헉. 평소에 나는 소유 지향적인 인간의 전형인 것 같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보며.

 

 언어의 변화는 생각을 한다(존재) 와 생각을 갖고 있다(소유)의 차이, 사람을 생각 할 때도, 어떤 차를 타는 사람, 어디에 사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심지어는 지식 및 독서도 소유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리뷰를 써서 기억의 마모를 둔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소유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존재 자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게 대부분이다. 또한 최근에 구직을 하는 학생의 입장으로는 나도 나의 존재로 평가 받는 게 아니라, 토익, 학점, 기타 스펙으로 평가 받는 세태이다. 이는 다 사람 또한 소유의 대상으로 이용 가치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요즘 드는 간절한 생각은, 스펙이 ...인 나가 아니라, 왠지 상쾌한 나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든다. 이는 내가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 사는 누구가 아니라, 왠지 포근하고, 따뜻한 사람들로 기억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음 그런데 괴팍한 사람도 존재로 기억하는 건가?ㅋㅋ

 

 이렇게 끝나는 책은 아니고, 책의 후반부에는 지리한 대안을 제시한다. 너무 어렵고 문자 그대로 지루해서.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멀뚱멀뚱 글씨 구경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어쨌든 이 책을 읽고나서, 약간의 사고의 지평은 넓어지지 않았나 싶다. 내 평생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소유냐, 존재냐 를 생각해보지 못했을꺼야,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것이 이 책을 읽는 유익이 아니었나, 혼자 합리화 해본다.

 

 

25쪽 우리의 자기 보존 기능을 마비시키는 또 다른 근거는개개인이 당장 눈앞에서 감당해야 할 희생보다는 차라리 아득해 보이는 막연한 재난 쪽을 택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64쪽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77~78쪽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힘을 쓰기 위해서 사는 것 - 오로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사랑하는 것이다.

 

95쪽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소유하는 여러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전반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용품, 재산, 의식(儀式), 선행, 지식, 그리고 사상 등등. 이 모든 사상(事象)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 실현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152쪽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175쪽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냐존재냐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 심리학자 > 심리학자일반
지은이 에리히 프롬 (까치,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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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12. 3. 00:27

 잠이 안와서, 내 쿼티 핸드폰으로 침대에 누워서 끄적인 글. 큰일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의 입문. 많은 사람들의 강추와 풍부한 이야기거리 덕분인지,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한국에서는 영화로 만들어진 그 소설.

 

 3권 짜리 소설이라는 압박 때문에, 예전 부터 읽기를 계획했었지만, 선듯 손길과 눈길이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창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어서, 뭔가 복잡한 서적을 읽기 보다는, 뭔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을 찾던 차에 백야행을 읽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었는데,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다른 책 읽다가, 또 이 책으로 돌아 왔다가, 장흥에서 서울 가는 버스에서도 읽고, 어느 날은 갑자기 밤에 필이 꽂혀서 잠을 포기하고 읽기도 하고. 그랬다.

 

 너무 많은 주인공들의 등장.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본명과 가명, 2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처음엔 애를 먹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2개의 이야기를 부족한 머리로 따라 가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읽을 수록 점점 빠져 들어갔고, 도저히 관련성이 없을 것 같던 2개의 이야기도 결국 하나로 모아지는 그 접점에서는 "헉" 하는 외마디의 작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을 사람이 있을지, 혹시 영화를 보게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자세한 결론을 이야기 하기는 힘들고, 그걸 이야기할 기억력도 부족하지만, 상상치 못할 반전이 기다리고 있고, 이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분명 사람들의 경악(?)을 즐겼으리라. 아마 그게 추리 소설 작가의 돈 버는 것 이외의 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라사와 유키호. 여 주인공.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녀의 미모.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하얀 어둠 속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남자 주인공. 미묘한 사랑. 여기까지. 더 이상은 스포일러 일 듯. 내 기억력의 부족을 이렇게 포장해본다.

 

 3권 까지 다 읽고나서. 이런 내용이 소설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봤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역겹지만, 주인공들을 보면 왠지 가엽기도 하고. 그들의 잘못은 분명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을 지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에는 미안하기도 했다. 이런게 스톡홀름 신드롬인가.


 간만에 추리 소설 읽느라 머리를 썼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잔상이 머리에 꽤 오래 남았나보다. 이번 주 주일 아침에 잠깐 개꿈을 꿨는데, 도망가느라 어찌나 힘들던지. 꿈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도망간 건 차암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백야행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태동출판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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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감독 박신우 (2009 / 한국)
출연 한석규,손예진,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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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8. 21. 22:54
 사람들이 강추하는 책은 대게, 이유가 있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더라. 여러 사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추천을 받았었다. 그 청년 바보 의사. 그 청년을 읽으면서, 그의 삶에 대해 두 가지 느낀점이 있다.
 
 먼저 하나님 중심의 삶.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는 그 청년. 그에게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섬세하게 개입하신 결과로 인식할 수 있는 민감함이 있다.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찾는다. 이런 일들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며, 나의 둔감한 신앙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를 항상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런 그의 신앙은, 그 안에만 머무르는게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타인에게 귀감이 되고, 감동을 준다. 선물하기를 좋아하던 그. 찬양 테이프와 신앙 서적들은 기본이었고, 상대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선물들. 전 목사님의 설교 중에, 격려를 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선물에도 실력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잠언 19장 6절에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청년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그 청년 또한 기꺼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던 것 같다. 바쁜 와중에서도 남을 섬기던 그. 반면에 소극적으로는 나의 이익 - 혹은 권리 - 를 침해 받는 것에 대해,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 민감한 나. 그러면서도 남을 섬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 정말 부끄럽기 그지 없는 인간의 표상이다.
 
 그의 이런 섬김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그의 말이라면 누구라도 신뢰할만한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그를 예뻐하셨을까.
 
 그는 33살의 나이로, 유행성 출혈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스티그마(흔적)들은 그의 주변에,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33살의 나이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지금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 나이.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가로서 새 발을 내딛은 나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조락이 시작된 나이정도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청년이 이 세상을 떠난 나이로 또한 기억될 것이다.
 
 백년을 살아도 의미 없게 살 수 있는 인생을
 짧은 만큼 더욱 가치 있게 잘 살아온
 그리고 이제 영원한 세계로 초청받은
 아름다운 청년
 
에피소드
- 핸드폰으로 이 책의 리뷰를 쓰며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에, 어떤 어르신께서 지갑을 택시에 놓고 오셨다는데, 차비가 모자라서 표를 끊을 수가 없으시단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안면도 없고, 돈을 돌려받기 어려텐데, 나에게 차비를 빌려줄만한 돈이 있다는게ㅋㅋ 그래도 방금 전까지 이 책을 읽고, 밀려온 감동으로 인해, 나중에 돌려 받지 못하더라도, 후의 죄책감 - 그 어르신께서 차비가 없어서, 혹시라도 터미널에서 밤을 지새우지는 않을까 하는 - 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급하게 돈을 찾아서 표를 끊어드렸다. 고맙다며, 버스에서 내려서, 아무나한테 빌려서 꼭 차비를 돌려 주신다던, 그 어르신.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오신다던 그 분은 결국.....ㅋㅋ 집에 조심히 내려가셨기를..
 
 22쪽 그리스도인은 의학적으로 혈관(vessel)에 비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더 많이 나누고 베풀수록 그 '혈관' - 그리스도인 - 을 통해 더 많은 피가 흘러, 혈관은 더 튼튼해지고 커져서 더 많은 생명의 피를 흐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을 통해 흐르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는 노력을 멈추면, 그 혈관은 퇴화되고 더 이상 생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마침내 주변의 다른 혈관이 자라나 그 일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청년이 읽었던 책들
 
축복을 유통하는 삶, 레위기 강해, 주님은 나의 최고봉, 요한과 더불어, 상처받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 시골의사 - 발자크, 당신들의 천국, 폴 브랜드 평전, 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오는가, 하나님의 모략,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신앙,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성채 - A.J. 크로닌, 펭귄 가이드북, 이 한장의 명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오리엔탈리즘, 평행과 역설, 인간의 일생,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우리 사랑할까요?, 찬양하는 습관,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하나님의 뜻,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 사람이 무엇이관대, 나는 사진이다, 살아있는 기억 매체, 소명, 아담, 지선아 사랑해,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 두 번째 기회, 그 외 헨리 나우웬의 모든 책들.

그청년바보의사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지은이 안수현 (아름다운사람들(이상순),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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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8. 21. 09:07
 
 지난 2009년 2학기 때, 서구문예사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했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문예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는데, 문학과 예술을 이르는 말이라는데, 사실 예술은 배웠지만, 문학은 배운 적이 없다. 아마 문학과 예술이라기 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뜻하는 건가보다. 어쨌든,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과목은, 인터넷 강의이기 때문에 수강한 것이었다. 학교를 하루라도 더 안가고자 하는 열망때문에, 어쨌든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학기때는 일주일에 학교에 4번만 다녔었다. 그런데, 올해는 지난 학기보다 수업을 덜 듣는데, 이번에는 일주일 내내 학교에 간다.
 
 사실, 지난 학기 때 가장 재밌었던 과목은 서구문예사였다. 이제 전공도 질리고, 사실 어려워서 하기가 싫어진다. 음. 사실 머리가 안따라가준다. 어쨌든, 처음에는 궁여지책으로 이 과목을 수강했었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즐거움 때문이었나, 재밌게 수강했었고, 그에 걸맞는 성적도 받았다. 부끄럽지만 지난 학기 때는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는데, 이 과목이 그나마 평점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역할을 했었다.
 
 생소한 분야에 관심이 확장되는 차에, 예전부터 작가님의 명성만으로 읽고 싶었던 책인, 이 책이 떠올랐다. 진중권 교수님의 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교수님의 이매진을 조금 어렵게 읽었던 터라,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조금 걱정이 됬었는데,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진중권 교수님도 미학이 생소하게 알려졌던 때에 이 책을 썼던 터라, 조금이라도 쉽게 쓴 것 같았다.
 
 이 책은 에셔의 작품 따라, 서양 예술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는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쓰여있다. 참고로 나는 에셔라는 사람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위키피디아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수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를 표현한 판화로 유명하다'고 한다. (2010년 7월 23일 현재. 3월 6일에 써놓고 임시 저장해놓은 글에 다시 이어서 쓰는 글. 당연히 책 내용은 다 잊어버렸다.) 수직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를 표현한 판화. 뭔가 맞지 않지만, 아귀가 들어 맞는 그런 그림. 그런데, 이러한 에셔의 그림의 순서를 통해, 미의 주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여기부터는 2010년 8월 21일에 쓰여진 글)
 
57쪽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은 그 뒤에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뒤섞이면서, 미학사 속에서 자꾸 되풀이된다.
 
 어느 예술이든지, 항상 2 가지로 대립하는 것 같다. 위에서 표현한 것 처럼, 일단 가상과 진리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를 조금 더 고상하게 표현해본다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이다. 헌데, 이는 최근에만 있었던 대립은 아닌 것 같다. 이는 선사시대로부터 이어져온 대립이다.
 
31쪽 선사 시대부터 우리는 벌써 두 가지 대립되는 재현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적 양식과 신석기 시대의 기하학적 양식이 그것이다. 현존하는 미개 부족들은 신석기 단계에 있기에 대부분 추상적, 기하학적 양식을 보여주는 데 반하여, 아직 구석기 단계에 있는 부시맨에게선 자연주의적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이 두 양식의 대립은 오랫동안 미술사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 대립이 인류 최초의 문명 세계에서도 새로운 형태로 되풀이 된다.
 
 그리고 이 미학 오디세이는 이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가상의 대화가 이루어져 있는데, 두 철학자의 가상의 대화를 읽으면서, 진중권은 진정 천재라는 생각을 한 두번 한게 아니었다.
 
 이제 여기서 급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책을 다시 읽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리뷰가 나올 것 같진 않다. 언제는 제대로 쓴적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여튼, 여기서 급마무리.
 
 E.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미학을 이에 빗대어 정의해보면, 객관과 주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혼자 정의를 내려본다.
 
 아참, 일단 1권은 선사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예술 작품을 다루는 것 같다.
 
207쪽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은 예술 활동으로나, 이론 활동으로나 모든 면에서 서로 적대적이었다. 다 빈치과 회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면,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i, 1475~1564)에게는 조각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었다. 다 빈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과학적 관차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다 빈치가 자신을 합리적 규칙에 따라 작업하는 과학자라고 생각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영감에 따라 작업하는 고독한 천재로 의식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한 차례 정면 대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피렌체 시가 두 천재에게 시의회 대회의실의 벽면에 각각 시의 역사에 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거다. 이 세기적 대결은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대결이 이루어졌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까?


미학오디세이1
카테고리 인문 > 철학 > 주제별철학 > 미학
지은이 진중권 (휴머니스트,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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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2. 4. 01:16

 금융사(史)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해서 책을 찾아보면, 항상 나오는 실패 사례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ING은행에 단돈 $1에 팔린 베어링 은행이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는 LTCM 파산 사건이다. 금융의 역사에서 두 금융기관은 실패의 사례로, 실패의 교과서로 여겨진다. 그래서 국내 금융 자격증을 공부하다보면, 실패 사례로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실패라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다. 베어링 은행의 파산 사건은, 직원 관리를 잘못해서 생긴 실패이지만, LTCM 파산 사건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다.
 
 LTCM의 설립자인 존 메리웨더는 LTCM을 설립하기 이전에는 살로먼 브라더스의 차익거래팀을 이끈 유능한 간부였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실수로 인한 실패와 나중에 LTCM의 실패는 거의 유사하다. 어쨌든 일단 살로먼 브라더스에서의 실패를 극복하고 LTCM을 설립한다. LTCM은 Long Term Capital Managemet의 약자로 말 그대로 장기 자본으로 투자하는 회사이다. 그의 일환으로 헤지펀드로서는 드물게 최소 3년 만기의 폐쇄형이었다. 그리고 LTCM이 유명세를 탔던 것은 무엇보다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을 스카웃해 그들의 투자이론으로 무장했기에 더욱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들의 투자 이론과 위험 관리 기법은 곧잘 들아맞아서 초창기에는 많은 돈을 벌어 투자자들을 기쁘게 하기도 했다.

 모든 투자의 기본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그 중에서 차익거래 기법은 선물 가격과 현물 가격의 차이를 이용한 것으로 무위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법이다. 그리고 스프레드 거래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초자산을 대상으로 하는 선물가격이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착안, 둘 이상의 선물계약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포지션을 설정하는 투기적인 거래형태다. LTCM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투자기법을 이용했다. (차익거래와 스프레드 거래 정의는 네이버 사전 참조.)
 
 그리고 이러한 투자 기법 외에도 LTCM은 레버리지를 다른 헤지펀드보다 크게 사용했다. 즉 자기 자본이외에도 빌린 돈이 LTCM의 투자 금액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겉으로 보기에는 안전한 기법과 명성으로 그들의 시작은 창대했다. 하지만 끝은 미약했다. 모든 금융 역사의 스토리는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하다. 창대한 시작은 결국 사람들의 욕심에 불을 붙인다. 이는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쓴 적이 있는데, 이는 초심자의 행운과 일치한다. 결국 초심자의 행운은 가혹한 시험으로 끝나게 된다.
 
 어쨌든, 그들의 성공으로 LTCM에 투자한 금융 기관들은 함박웃음을 지었고, 더 투자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었다. 그들은 점점 시장에서 큰 고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골의사 박경철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인데, 고래에 연못이 있다고 생각하자. 연못의 대부분을 고래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경우에 고래가 빠져 나간다고 생각한다면, 연못의 물은 크게 출렁이다 못해 바깥으러 넘치기까지 할 것이다. 이를 금융시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지난 금융위기 때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생각할 때, 외국인이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우리나라 주식 시장이 엄청나게 출렁였었다. 그 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던 이야기들은 반토막이었다. 어쨌든 LTCM은 거대한 고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시장에서 빠져나가면 시장이 크게 출렁인다는 이야기이고, 그들이 매도하는 물량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팔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장에 매도자밖에 없다면? LTCM이 파산한 이유 가운데, 이러한 배경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들은 위험을 간과했었고, 인간적인 요소human factor를 무시했다. 그들은 미래의 리스크를 과거의 가격과 변동성을 근거로 추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실수였다. 어쨌든 그들은 이론을 신봉했지만, 항상 세상이 이론과 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것을 간과했다. 이번 금융 위기도 마찬가지 였다. 그 덕분에 유명해진 책이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블랙 스완이다. 정규 분포의 극단의 사건들이 역사에서, 특히 금융의 역사에서는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 아시아의 금융 위기 등의 일련의 사건들은 시장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모든 시장은 출렁였고, LTCM이 보유한 포트폴리오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그들의 위험관리 기법이 딱 들어맞았다면 그들은 많은 돈을 벌었을텐데, 아니 최소한 잃지는 않았을텐데, 그들의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자산들은 결국 흔들렸고, 위기가 되니깐 모든 자산의 가격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즉 폭락했다.
 
290쪽 위기시에 '상관 관계는 항상 1이 된다.' 지진이 일어나면 모든 시장이 흔들리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첨단 투자 기법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버렸다. 결국 그들은 미국 정부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금융의 역사에서 항상 되풀이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원래 파산시켜야 마땅하지만, 파산시키기에는 너무 여파가 크기 때문에, 즉 too big to fail. 이번 금융 위기 때도 마찬가지로 많은 금융 기관들이 구제 금융을 받았다.
 
 이러한 탐욕으로 인한 금융 위기 발생 시, 피해를 입는 사람은 다수의 대중이다. 특히 최근의 금융 위기는, 실물에서 전이된 위기라기 보다는 금융 그 자체의 문제로 발생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융의 문제가 실물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이제 금융에서의 위기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은 적절하게 규제되어야 한다. 최근 오바마 정부에서 금융 산업을 규제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덕분에 주가가 많이 떨어져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들의 계획에 찬성한다. 특히 국민들의 세금으로 구제 금융을 받을 때는 얼씨구 하고 받고, 조금 살아날 기세가 보이니까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특히 일반 국민들은 아직도 경기가 회복됬다는 것을 크게 체감하고 있지 못한 상황인데 말이다. 어쨌든, 금융은 적절하게 규제되어야 한다.
 
 책의 내용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로 흐르긴 했다. 음. 재밌게 읽긴 했는데, 조금 어렵기도 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이 많아 헷갈리기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름대로 재밌는 책이었다.
 
102쪽 원칙적으로는 세상이 과거처럼만 돌아간다면 리스크는 없다.
                                         _ 머턴 밀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276쪽 금융은 종종 한 편의 시만큼이나 공정하다. 그것은 무모함을 적절한 열정으로 응징한다. LTCM의 채권자들은 과거 자신들의 너그러움이 현재의 혼란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보통은 고객이 파산해도 대출해 준 사람은 마진의 형태로 담보를 가지고 있겠지만, LTCM의 경우에는 이론적으로 아예 아무것도 못 건질 수도 있었다. 은행들이 LTCM에 헤어컷을 면제해 주면서까지 자금 지원을 해준 것이 펀드가 한계점까지 운용되도록 도와준 격이 되었다. 이제 만약 LTCM이 도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362쪽 미래의 리스크를 과거의 가격과 변동성을 근거로 추측할 수 있다는 믿음이 거의 모든 투자 은행과 트레이딩 부서에 팽배해 있었다. 바로 이것이 LTCM의 기본적인 실수였고, 그들의 엄청난 손실은 현대 금융학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풀기 어려운 결점을 폭로한 것이다.

천재들의 실패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로저 로웬스타인 (한국경제신문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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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1. 29. 10:23
 참 재밌게 읽었던 소설인데. 오늘 아침에 J. D 샐린저가 타계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래서 예전에 썼던 리뷰를 이 곳에 다시 올려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개를 받고(?)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상실의 시대>였나, <비밀의 숲>에서였나, 혹은 두 책 모두에서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게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좋아했나보다. 이 제목을 본 후, 나의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추가한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었는데, 이 책을 사고 책의 겉표지를 보니 겉표지에 최고의 책이라고 소개되고있다. 이 책을 읽고 솔직히 내가 최고의 책이다, 아니다 라는 판단을 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엇나간 이야기 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책을 읽고나서 책의 별점을 주는 것이 어려워서 보통 책을 읽으면 그냥 별점 4개를 준다.)
 
 홀든 콜필드. 주인공의 이름이다. 퇴학하고 집에 돌아가는 며칠동안의 일들을 적은 내용이다. 작가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인지, 혹은 그저 소설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냉소적이다.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중에 몇가지 공감가는 것들도, 내가 성장을 하며 생각했던 것들도 간혹 있었다.
 
247~248쪽 엔톨리니 선생과 홀든 콜필드의 대화중에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위의 글이 콜필드의 문제점을 지적한 가장 적합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작가인 J.D 샐린저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픈 이야기도 아마 위의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보통 이 책을 성장소설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성장하는 모습이 주된 내용이 아닌 것 같다. 학교에서 자신을 부적격자로 낙인찍고, 집으로 돌아가는 며칠의 방황기간이 이 책의 분량을 채우고 있다. 며칠의 방황동안, 콜필드가 생각해왔던 것들-주위 사람들에 대한 비판, 세상에 대한 환멸, 냉소, 자신의 용기없음-을 통해 그 당시 세태를 비판하고자하는 소설이 아니었나싶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콜필드가 비판한 것들 중에 맞는 말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내 멋대로 이렇게 말할수는 없지만, 내가 느낀 것은 이런 것이다.
 
 홀든 콜필드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찾으려고 했던 걸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피하고 결국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아이들을 구하고자하는 그런 모습을 원했던 것은, 자신만이 유일한 어른인 상태에서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일들을 어린아이들이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까?
 
229~230쪽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이 부분을 읽고 왜 이 책의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영어로 된 제목(The catcher in the rye)을 읽을 때 이 부분이 더 잘 와닿는 느낌이다. 어쨋든 좋은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251쪽 결국 학교교육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알게 해주고, 거기에 맞게 이용하게 해주는 거야.

호밀밭의 파수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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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1. 28. 01:22
 
 작년에 읽었던 책. 작년 부쩍 우리나라 현대사가 궁금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그것이 촉발되었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이 후에,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어떤 책이 좋을까 싶어서 고민하던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냥 거창하게 현재 우리나라 정치 구조에 누적된 문제점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혹시 멀지 않은 가까운 과거를 알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고, 솔직히 말하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서 였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책은 1940년대 1편으로 일제 치하로부터 해방된 1945년, 1946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강준만 교수님이 머리말에 쓴 이야기인데, 한 대학생이 40년대 후반의 이야기를 읽다가, 우울해서 이 책을 덮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덮지는 않았고 - 사서 읽은 책이었기 때문에 다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 속으로 욕을 하며 읽었다.
 
 해방 이 후, 격동의 1940년대. 이 책을 읽고 가장 오래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해방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이 기뻐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그 전대로 무표정하기만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줄곳 겁을 먹고 지내왔고, 해방된 그 순간에도 일본 경찰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바로 기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4~5시간 후 대폭발로 이어졌다. 어쨌든 나는 이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고 가슴이 아팠다. 기뻐도 곧바로 기뻐하지 못했던 그 4~5시간.
 
 어쨌든 해방 이 후, 하지만 기쁨의 순간만이 그 시간을 채웠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 갑작스럽게 와서, 아무런 준비도 못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시기, 우리나라이 진짜로 영웅이 나왔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분단되어 있지도 않았을테고, 친일파들이 득실거려, 후대에도 떵떵거리며 살지는 았았을 게다. 영웅이 나오기는 커녕 영웅인 척 하려했던 사나이-슈퍼맨이었던 사나이 패러디 - 들만 득세했다. 어쨌든, 그 시기 영우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나보다. 이는 인정욕구와 영웅주의라고 저자는 분석했던 것 같다.
 
 이 때 친일청산을 했어야 했지만, 슬픈 이야기이지만 일제 치하에서 미군정으로 변화되었을 때, 전범국인 일본을 철저하게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미국이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도, 그에 합당한 벌을 받지 않았다. 아마 일본의 힘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의 힘 또한 약해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또 그들은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더 큰 권력을 누렸다고 한다. 이 참을 수 없는 기회주의.
 
10쪽 이 시기에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면, 그건 대세 또는 힘이 센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였을 것이다. 해방 이틀 후 소련군이 서울역에 들어온다는 헛소문은 그런 기회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나게 해준 사건이었다. 후일 강력한 반공(反共) · 반소(反蘇)주의자로 활동하게 되는 사람들도 그때엔 소련군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피가 끓는 원한관계, 전통적인 유대관계, 대세 추종의 처세술 등과 같은 동기들로 인해 빚어졌거나 증폭된 갈등마저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의사(擬似 : 실제와 비슷함) 이데올로기 투쟁' 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음. 친일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친일을 했으나, 인정하지 않은 뻔뻔한 친일, 그리고 반성하는 친일. 물론 모두 잘못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정당화하는 친일이 많지 않나 싶다. 한편 내가 당시에 살았더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려나? 모르겠다. 하기야. 친일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는건데, 친일 하는 것도 아마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단결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의 과잉으로 인해 너도나도 우익, 좌익을 선택받기를 강요받았고, 흑백논리는 덤이었다. 중도를 지키기란 어려웠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저자는 그 동안 오랫동안 막혔던 둑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표현했고, 통제가 어려웠고, 통제를 시도할 주체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애국심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는 시정잡배도 정치를 부르짖었고, 영웅이 되던 시기였다.
 
 또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백범 김구에 대한 점이다. 그냥 지금 우리나라에서 김구 선생이 과대평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에. 뭐라고 할 말은 없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그냥 단편적인 생각일 뿐. 당시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는 정치자금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종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현실 상황을 오판 했었고, 자신의 욕심인지, 민족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지난 해, 조정래 작가님의 강연회를 듣고서, 뭔가 생각한 게 있었다. 청산리 전투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사람은 김좌진 장군인데, 사실 그 때 김좌진 장군 말고도 기억해야할 분이 있다고 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어쨌든, 남한과 북한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영웅화 시켰다는 말씀이었다. 즉,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김구에 대한 평가도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한 것 같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지껄인 이야기이고,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래 빈수레가 요란하다고들 하니까.
 
 그리고 당시 임시정부는 분열하고 있었고, 과도한 보상욕구와 인정욕구에 굶주렸다고 한다. 결국 민족을 위해 했던 일이라고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순수하게 민족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던가보다. 아마 영웅이 되고 싶었던 마음도 컸을 것이다.
 
136쪽 이타적 삶을 산 사람들의 과도한 보상욕구가 문제였을까? 보상욕구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런 전통은 훗날까지도 계속되어 민중으로 하여금 엘리트의 이타적인 행동을 정략적인 '장기 투자' 로 보게끔 만드는 가공할 효과를 낳게 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책 읽은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예전에 조금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쓴 글인데, 뭔가 당시에는 재밌게, 애써 읽었었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아 지금 머리에 남은 게 많지 않다는 것이 슬프다.
 
18~19쪽 진정한 '낙관과 긍정'을 위해선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래야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다. 그래야 오늘이 규명되고 더 나은 내일이 열린다. 어떤 역사적 조건의 산물 또는 역사의 상흔은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의식구조로까지 자리잡아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역사 탐구의 장점은 현재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의 기원을 캠으로써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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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1. 25. 23:22

 두번 째 읽는 에밀 아자르, 아니 이번엔 로맹 가리의 소설. 이 소설은 단편이다. 단편 중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제목이 있는데, 그 제목을 이 책 전체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 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워낙에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뭐가 재밌는지도 모르겠고, 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는 이유도 잘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왜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친구의 문자-이 책은 인간의 악함을 다루고 있다는-를 받고서, 그제서야 재미를 느꼈었다. 이 책은 인간의 참을 수 있는, 아니 참을 수 밖에 없는 악함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나는 아직 내공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토로를 했다.
 
 이 책에는 16편의 단편 소설들이 있다. 모두 하나같이 부도덕하고, 악한 인간들의 군상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의 군상들을 보고 있으면, 아니 읽고 있으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 지는 것은 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로맹 가리 자신의 모습도 또한 소설 속에 조금이나마 녹아 있지 않을까 싶다.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이다. 그냥 얼마 전에 폴 고갱을 모델로 한 달과 6펜스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스트릭랜드가 최후를 맞이한 섬인 타히티와 폴 고갱이 이 이야기에서 언급된다. 이 이야기는 탐욕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나 홀로 섬에 간 주인공이 그곳에서 폴 고갱의 그림이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그 그림들을 비싼 값에 매입한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그림은 모사된 그림이었고, 결국 그는 순수를 찾아간 그 섬에서 조차, 탐욕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재밌게 읽었다. 벽을 사이에 둔 남녀의 자살, 부질없는 망상, 오해, 외로움, 관음증을 다룬 이야기인데, 짤막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이 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한번 읽어보시라! 단편 모음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부담도 적은 것 같다.
 
 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재밌게 읽었다던,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궁금한건 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 다고 글을 썼을까? 왜 하필이면 페루일까? 하는 생각들인데 별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다. 
 
18쪽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
 
 
 
115쪽 "(생략)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획일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생략)"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로맹 가리 (문학동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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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1. 21. 00:21

 지난 2학기가 시작되기 전, 한심한 여름방학을 보낸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내가 도대체 해놓은 게 뭐지?' 하는. 뭐 해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나. 나름대로 금융권 취업을 준비해왔으나, 장담은 못하겠고. 그리고 금융권에 가서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난 금융 위기 때, 금융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도 들고. 어쨌든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읽으려고 찜해두었던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감히 파이낸스 커리어 바.이.블.이라고 스스로 소개한 이 책.
 
 사실 바이블이라는 단어가 성경책 이외의 곳에서 사용될 때는 비법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 때, 바이블이라고 소개되는 것들을 접할 때 보통 느끼는 감정은, '어디 감히?'와 '왠지 신뢰할만한' 것이다. 이 책은 왠지 신뢰할만한 류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4가지 스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용했던 것은 첫번째 스텝인 산업이해하기. 전반적인 금융업에 관한 소개와 구체적으로 기업금융, DCM, ECM, 주식 리서치, 주식 · 채권 세일즈와 트레이딩, 자산운용, 자기자본투자, 사모펀드 에서 해야할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읽다보니,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구나, 나에게 이런 일들이 주어진다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내가 이런 일들을 하기에는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뭔가 넘사벽(넘을수없는 사차원의 벽)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분야에서 하루 일과를 시간 단위로 해야할 일들을 일기형식으로 쓰여진 글들을 보고서, 쉬운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말 멋있어 보이기는 한데, 그만큼 힘든일들인 것 같다. 그리고 중간에 금융 전문가의 추천도서도 좋았고, 영문 자기소개서, 레쥬메 작성방법, 인터뷰 준비하기 등등 금융권에 진출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유용한 정보들이 많이 있었다.
 
 책에는 2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재미를 위해서, 즉 심심해서 읽는 책과, 필요에 의해서 읽는 책. 이 책은 후자에 해당되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서 느는 것은 한숨 뿐. 후. 고민만 더해가는 구나.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0. 1. 11. 01:52

 하루키의 팬이라거나, 혹시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면, 하루키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 쯤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약 2년 전에 읽었던 비밀의 숲이라는 에세이에서 취미로서의 그의 달리기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금 그의 취미가 달리기였다는 것을 일깨워 준 책이 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도대체 달리기를 얼마나 좋아하길래, 이렇게 책으로까지 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이 책은 달리기에 대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08년, 뜨거웠던 여름. 나도 달렸다. 달리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3번은 30분 이상 달리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적어도 10월 이전까지는 그렇게 지켜왔다. 그 때 뭔가 달리기를 하는데, 동기부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뭔가를 찾다가, 이 책에 이르게 되었다.
 
45쪽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나는 하루키처럼, 강물을 생각하려 했고, 구름을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안들고, 도대체 왜 뛰고 있을까, 그 때는 사람들 많은 곳에 있으면 신종플루 걸리는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녁 8시 정도 쯤에는 달리기를 하려는 사람이 공원에 많았기 때문에, 괜한 걱정을 했었다. 그리고, 달리기를 하면 뭔가 머리 속에 드는 생각은, 내일 해야할 것, 오늘 잘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아마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일은 쓸데 없는 생각 안하고, 도서관에서 쫌 더 오래 공부해야겠다.'
 
  음. 하지만 10월 이 후에는, 중간고사를 전 · 후로 갑자기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과제와 시험공부 때문에 달리는 시간을 확보하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결국 일주일에 겨우 한 번 하다가, 11월 이 후로는 달리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의 심장과 폐는 몇 달 동안 계속 같은 패턴으로만 운동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하루키의 달리기는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그의 본업은 러너?, 그리고 하루키는 한가하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엄연히 하루키의 직업은 작가이다. 그런데 그가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글을 더 잘 쓰기 위해서이다.
 
264쪽 내 경우,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 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레이스나 연습을 위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빼앗겨버리고 나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할까, 약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로 현재로서는 비교적 온건한 단계에 나 자신을 머물게 하고 있다.
 
 사실 처음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생각했던 하루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서 느꼈던 하루키는 괴짜일 거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글쓰는 것만 빼면 평범한 직장인과 비슷한 모습이다. 규칙적인 기상과 취침, 그리고 일(글쓰기 혹은 강연). 그리고 취미로서의 달리기. 뭔가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분명히 평범한 남성인데, 어떻게 그의 머리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는지.
 
 하루키는 33살 즈음에, 러너로서, 소설가로서의 출발점에 섰다. 지금은 만 60이 넘은 나이인데, 그 나이 이후로 꾸준히 달리기를 해왔다. 그는 그의 서른세살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나이. 스콧 피츠제를드의 조락은 그 나이 언저리에서 시작되었고,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그리고 러너로서 발을 내딛는다.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달리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의 달리기 이야기들. 실제 아테네 병사가 뛰었던 마라톤 코스, 뉴욕 그리고 보스톤, 트라이애슬론까지. 그의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 바로 달리기를 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마라톤에서의 마라톤에 관한 그의 글을 읽을 때는 그의 인간적인 면도 엿볼 수 있었다. 먼저 '그까짓 쯤이야 -> 덥긴하지만 뛸만한데? -> 목마른데, 맥주마시고 싶다. -> 지겹다. 괜히 시작했네. -> 아, 화난다. 그런데, 화낼 기운도 없다. -> 휴. 도착.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 대충 각색해서 이런 심경 변화가 있었다. 아테네의 마라톤 코스의 달리기는 한 남성 잡지에서 하루키에게 부탁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달리기가 결국 그의 첫번째 마라톤 완주 기록이 되었다. 음. 그리고 그의 트라이애슬론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나도 한번?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음. 언젠간 하게될지도? 어쨌든, 하루키는 달리기를 하면서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은 작가이자 러너이다.
 
 아마, 우리도 하루키의 달리기와 같은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경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문을 꼭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특히 토요일 신문. 음. 우리도 뭔가 나름대로 규칙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하루처럼 철학적인 것으로 승화시킨다면, 아마 우리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something!
 
87~88쪽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젊었을 때라면 확실히 '적당히 해도' 어떻게든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혹사시키는 연습을 하지 않아도 이제까지 쌓아왔던 체력의 축적만으로도 무난한 기록을 올릴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103쪽 마라톤 마을의 아침 카페에서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찬 암스텔 비어를 마신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그러나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115~116쪽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그맊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 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246쪽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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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