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2012. 10. 22. 18:53





“꽃을 꺾기 위해 덤불 속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덤불 속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 상처받는 것이므로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

조르주 상드의 사랑론(論). 사랑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은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하여 꺾어 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상이다. 꽃은 꺾으면 시든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 물론 이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야기는 사랑의 상처에 대한 메타포는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랑 - 이라고 착각 - 을 하며 상처를 받았다는 핑계를 대지 말자.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자. 물론 이 기다림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 에로스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8. 21. 22:03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라는 물음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도 ‘그거 알아서 뭐하게.’라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아마 나는 그리 대답했을 것 같다. 생각을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을 이유로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의 생각은 주체적으로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사,2009)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를 이야기 하는 책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만들어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목적 하에, 주입된 어떤 것이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교육을 이야기한다. 단순 주입식 교육은 생각을 못하게 하고,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 객관식 문제는 사고의 틀을 단순화 시킨다. 그리고 그런 시험으로 매겨전 등수는 학생들을 서열화 시키고, 서열의 상위에 위치한 학생들은 사회의 기득권층이 된다.

43쪽 인간과 사회에 관해 질문을 던질 줄 모르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이 기존 체제를 지키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비판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세계에는 지배세력이 기획, 의도하여 암기하도록 한, 세뇌시킨 것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회의하지 않고 고집하기 때문에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친 교육’의 실상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기 생각과 논리가 없어 지배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구성원을 양산하는.

 우리나라 교육은 전체주의를 강요한다. 근대적인 우리 교육은 일제의 일제의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잔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체주의는 우리의 생각을 경직시킨다. 전체를 따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곳은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 학교이다. 이는 비단 학교 뿐만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를 강요하는 곳은 모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 사회는 맘몬신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고발한다. 물질은 최고의 선이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부자되세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우리나라. 홍세화씨는 오랜 프랑스 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와, “부자되세요.” 라는 광고를 보며, 끝에 (마음의)라는 말을 끝까지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 너무 큰 기대였었다.

 이는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시스템화 해온 결과물이다. 특히, TV의 광고는 끊임 없이 소비를 강요한다. TV 광고 뿐만 아니라, 지하철 역 앞의 버스에 프린팅 된 맥주 광고, 길을 지나가다 보는 광고판을 통해서도, 그 물건을 가져야 괜찮은 사람이 될거라며 속삭인다. 이 또한 우리의 생각을 오로지 자본에게 집중시킨다. 주체적인 생각을 방해하고, 자본에 종속시킨다.

 저자는 이 외에도 언론의 폐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오랫동안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온 언론. 그러한 언론에 길들여진 우리는 그 언론이 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언론은 기득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신문 기사를 자세히 뜯어서 읽어보면, 과연 누구의 입김을 대변하고 있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기사를 활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의도한 대로 우리의 생각이 형성될 것 이다.

 그러면 우리 주위의 환경들은 끝끝내 우리의 주체적인 생각을 방해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나만의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는 물신에 맞설 수 항체를 기르고 가치관의 문제를 바로 잡는 것일 것이다. 

205쪽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유일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온랒 유령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나’와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긴장과 성찰이 요구된다.

 결국 우리 존재에 대한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존재를 둘러싼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자기 성찰은 본질에 집중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는 물질보다 더 귀한 존엄한 한 인간에 대한 성찰로 이끌고,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에 딱 떨어지는 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물음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내 생각이 어떻게 형상되었는지에 관하여 자문하는 것이 물신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 한다.

98쪽 말하자면 귀소본능이란 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라는 관계로부터 비켜나 있다고 기억되는 곳에 안기고자 함이라는 얘기다.

179쪽 성숙한 사회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의 의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강제에 의해 정착되거나 성숙될 수 없다. 구성원들이 민주적이머 주체적안 시민의식을 형성하지 못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04-205쪽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고. 그러니 이제 사람 사는 방식의 변화도 당연한 것 아니냐고.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 여행을 즐기던 사람들이 심심찮게 하는 말처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장소와 차이와 시대의 변화에도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꿈과 욕망,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그것들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위를 향유하고자 하는 본원적 욕구는 변할 수 없다. 다만 각박한 현실이 잠시 우리를 눈멀게 하고 있을 뿐이다.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유일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온랒 유령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나'와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긴장과 성찰이 요구된다.


생각의 좌표

저자
홍세화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09-11-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5. 16. 22:36

먹거리에 대한 불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먹거리가 산업화가 되면서 부터 일 것이다. 먹거리에도 경제의 논리가 개입되어 저비용, 대량생산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었다.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식의 질은 무엇으로 담보할까? 현대의 음식산업은 그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이상 우리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323~324쪽 수세기 동안 먹는 행위는 특별한 순간을 의미했다. 대화와 감정을 나누는 시간, 즉 대부분의 경우 즐거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음식은 그저 습관이 되었고, 혼자 빨리 먹어치워야 할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광고의 대상이 되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음식은 빨리 해치워야 하는 대상이 되었고, 광고의 대상이 되었다. 광고는 우리에게 빨리, 많이 먹으라고 부추킨다. 그리고 식품회사는 더 많이 팔아 수익을 남기기 위해 질이 담보되지 않은 저비용의 재료를 사용해 우리의 입에 넣는다. 그리고 그 수익은 다시 광고비로 들어가 우리에게 또 먹을 것을 강요한다.


이러한 악순환은 식품회사와 정치와의 유착관계로 인하여 계속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건강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비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식욕을 억제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이는 본명히 사회경제적인 문제이다.


308쪽 식품의 산업화는 우리가 몰랐던 몇몇 회사들에게 더 큰 이득을 안겨주는 '혁명'이다. 더 나쁜 것은 식품업계가 언론 조작과 광고 공세를 통해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저야 한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비윤리적인 기업의 행태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탐사하며, 불편한 진실을 알린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위와 같은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더 똑똑해여쟈 한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자각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나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식욕을 다스리고, 조금 더 똑똑해져야 겠다는 것과 식품회사를 믿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래도 요 근래, 탄산음료와 패스트푸드를 안먹기로 다짐하고, 예전에 비해 조금 더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음식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환경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소비를 부추킨다. 기본적인 욕망을 자극하면서. 그리고 깊은 생각을 못하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 책은, 전세계적은 식품기업의 은밀한(?) 비밀을 폭로하지만, 사고의 외연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그리고 우리를 속이고 있- 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는 다른 것들도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씁쓸한 결론을 스스로 내려보며, 책장을 덮었다.


326쪽 우선,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소비자이기 이전에 시민으로서, 우리는 매일 먹는 세 끼 식사를 투표하듯 선택해야 한다. 그 투표에 세상이 독성물질로 가득 찰 것이냐 아니냐가 달려 있다. 우리는 환경과 건강, 윤리를 생각한 떡에 표를 던져야 하며, 그 힘은 구매력에서 나온다.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 일은 투표소에 가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직접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어울리는 유일한 순간이 되었다.


소비에 종속되어서는 안되지만, 우리는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소비를 해야한다. 비록 우리의 소비(표)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하나하나 모이다보면, 우리 나름대로의 힘을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비판적인 소비의 승자는 결국 비윤리적인 자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힘을 윤리적인 소비를 해야할 것이다. 숨막히도록 우리를 둘러싼 자본과 항상 욕망을 부추키는 광고에 맞서 이기려고 노력하지만, 맘같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가진 조그마한 힘이라도 이렇게 사용해야지.



독소: 죽음을 부르는 만찬

저자
윌리엄 레이몽 지음
출판사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5-17 출간
카테고리
건강
책소개
2001년, 미국은 9·11 테러 희생자(2,752명)보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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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7~328쪽 국제비만대책위원장이자 토니 블레어 정부 때 보건 고문을 맡았단 필립 제임스 교수는 시드니 비만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비만 위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는 의학적이거나 과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건 전 세계적인 의료체계를 집어삼킬 엄청난 경제적 문제입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을 오늘날 비만 유행병을 일으킨 모든 식품 체인을 과잉보호하는 데 사용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기름과 지방, 당분 과다 생간은 농업 수익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보조금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리가 겪고 있는 건강 위기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