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17. 23:07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친한 형의 블로그에 갔다가 다시 읽게 된 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을 담는 직업이 시인이 아닐까 싶다. 문학의 길을 걷는 사람을 일컫는 많은 단어 - 가령, 작가, 소설가 등 - 중에서 왜 하필 시인에게만, 인(人)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아마도, 시라는 장르가 인간의 감정선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의 시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이다. 일명 국민 연애시. 학창시절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 하며 지은 시란다. 전혀 즐거운 편지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기다림조차 즐거움이었기에, 혹은 편지를 쓰며 생각이 난 그 연상의 여인이 생각나 웃음 짓지는 않았을까. 그리하여 그 편지는 즐거운 편지가 되었고.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2. 12. 16. 00:38

한 촉망 받던 미모의 여류 화가의 장래를 꺾는 것은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당신의 그림에는 깊이가 없어." 이는 한 평론가의 평이다. 깊이가 없다는 평을 접하자마자 그 여류 화가는 깊이 없음을 자책하며, 결국 파멸의 길로 접어들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그 여류 화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평론가는 그녀의 그림에 대해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칭송했다.


이는 실화는 아니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소설집 「깊이에의 강요」(열린책들, 2000)에 실린 단편 <깊이에의 강요>의 내용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깊이"라는 상대적인 단어를 비꼬고 싶어서 이 단편을 썼을 것이다. 아마 자신의 글에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평에 대한 항변을 깊이에의 강요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나 그리고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깊이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대화를 나누며, 그 사람의 깊이에 대해서 가늠해 보지만, 결국 결론은 "어느 누군가의 깊이는 쉬이 판단할 수 없다." 라는 점이다.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사람도 나름의 깊이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또한 자못 심각한 척, 진지한 척하는 나는 깃털처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깊이가 없는 사람의 전형이기도 하다.


관계에 있어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깊이에 다다를 때,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깊이 없는 가벼운 만남은 너무나도 싫다.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평생의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만남이라면 깊이가 있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류의 깊이에의 강요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깊이에의 강요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8-03-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깊이가 없다`라는 평론가의 말에 `깊이`가 무엇인지 구현하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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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11. 11. 22:39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원작을 먼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용의자 X의 헌신>(2006, 현대문학)을 읽었다. 한 넉넉잡고 집중해서 3시간이면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가방에 2주간은 넣고 다녔다가, 어제 드디어 완독! 책장을 덮고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의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의자 X"가 개봉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비판은 추리영화가 아니라 사랑영화라는 것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추리소설 대가의 소설이기에 그러한 평은 당연했을 것.


이 책은 천재 수학자의 논리 싸움을 그렸다기보다는,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전제가 되어 흘러간다. 그러므로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러 갔다면, 천재 수학자의 추리를 기대하기보다는 헌신적인 사랑 - 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 을 기대하고 가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392~393쪽 이 세상에는 거기에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숭고한 것이 존재한다.


<백야행>(2000, 태동출판사)에 이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두 번째 읽었는데, 두 책에서 나오는 공통적인 사랑의 방식은 모두 한 사람과 관계하는 그 자체로 행복해하는 한 남자가 사랑의 대상을 지키는 - 비록 방법이 옳지는 못하지만 - 것이다. 그리고 항상 먼발치에서 그 사람을 지켜본다. 썩 부럽진 않지만, 헌신적인 사랑을 함에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일을 하든지, 추리를 하던지, 전제가 잘 못 되면, 아무리 일을 해도 헛수고가 된다. 최근 내가 저질렀던 실수도, 전제의 오류가 있던 데이터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발생했었다. 지지난 주 금요일 완벽하게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을 하루, 이틀 만끽했었지만, 지난 월요일에 출근하고 나서 오류를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의 절망감이 들 때의 아찔함.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또한 치밀한 논리 싸움을 하면서, 전제를 비틀어, 결국 자신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논리 싸움에서는 승리했다. 결과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나.'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이 결정되고, 그 방향은 우리를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 올바른 토대 위에 집을 짓고, 우리가 응당 있어야 할 그 곳에 이를 때 까지, 끊임 없이 올바른 곳에 서 있는지 점검하자.


그나저나, 책 다 읽고 영화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이제 조만간 영화 내리겠지? 자, 이제 영화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소설속 주인공을 분했는지만 확인하면 끝!




용의자 X의 헌신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06-08-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정교한 살인수식에 도전하는 천재 물리학자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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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