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3. 22:36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는 편안함이 있다.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그의 면목이다. 나는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덤덤한 문체와 꾸밈없는 그의 일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비밀의 숲><문학사상사, 2007)이라던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 2009)를 읽을 때는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그저, 작가로서의 삶을 느낄 수 있고, 옆집 아저씨로서의 삶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의 소설도 좋아한다.


 가장 최근의 에세이 <잡문집>(비채, 2011)은 말 그대로 잡문을 엮은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게 뭐야."라며 실망할 사람도 더러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잡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춘다면,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기대치를 낮춰 읽긴 했지만서도, 이걸 그냥 넘겨야 하나, 다 읽어야 하나, 고민 했던 분량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재즈에 관한 글들. 전혀 문외한이라서. 그럼에도 일단 모든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다 읽기는 했지만, 역시나 읽고 나면,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찌하랴. 잡문집인 걸.


 그래도 아무리 책으로 내기는 부족한 글들을 겸손하게 잡문집이라 칭하였어도, 그의 철학과 삶, 일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으로서 이 책을 읽는다면, 소장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그중 몇가지 좋은 글들을 적어본다.


먼저 주례사 중에서,

87쪽 가오리 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그리고 그의 예루살렘 상 수상 연설 <벽과 알> 중에서. 사실 이 부분을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91쪽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그래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은 시간이나 역사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소설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벽 쪽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과연 그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그의 기억에 관한 공감할 수 있는 글.


196쪽 우리의 인생이란 기억의 축적으로 완성된다. 그렇지 않은가? 혹시 기억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지금 현재의 우리밖에 기댈 곳에 없는 셈이 된다. 기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떻게든 자기라는 존재를 하나로 묶고, 동일시하고, 존재의 중추 같은 것을 - 설령 그것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더라도 - 일단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뭐랄까, 쿨한 삶의 철학.


257쪽 과거에 쓴 작품은 웬만하면 일단 다시 읽지 않습니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다'라고 하면 꽤나 멋지게 들리지만, 내 소설을 집어든다는 게 왠지 멋쩍고, 다시 읽어본들 어차피 마음에 안 들게 빤하니까요. 그보다는 앞을 내다보며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343쪽 독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뛰어난 문장도 아니요 재미있는 줄거리도 아니요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분위기인 것이다. 내가 특히 마음을 쓴 부분은 그들의 '올바른 자세'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일본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작가로서의 철학.


445쪽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사람을 불러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맛있는 음료는 내놓고, 상대가 그곳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것. 마치 자기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뛰어나면서도 바람직한 이야기의 본디 그대로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곳이 설령 어마어마하게 멋지고 호화로운 방이라도 상대가 편히 쉬지 못하면 바람직한 방 =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겠죠.


하루키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잡문집을 읽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1-11-2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30년 하루키 문학의 집대성!『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197...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4. 3. 22:18

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점심을 먹고, 기형도 시집을 펴서 읽는데, 진눈깨비가 나왔다. 그리고 창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19년만에 4월의 서울 하늘에 내린 눈이란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2. 3. 27. 21:37

4월의 봄날 같은 영화. 싱숭하기도, 생숭하기도 한 영화. 건축학개론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카피로 모든 (잠재적) 관객을 영화 주인공으로 만든다. 특히 첫사랑이라는 단어에서 풍겨오는 아련함이 많은 관객을 공감하게 한다. 첫사랑이라. 남녀 간의 사랑 중에서 가장 순수할 수 있고, 서투를 수 있고, 풋풋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첫사랑은 그런 거다.


영화를 보며, 첫사랑의 풋풋함과 캠퍼스를 누비던 대학생 시절이 그리워졌다. 사실 요즘 첫사랑을 대학교에 와서야 했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첫사랑과 캠퍼스는 잘 어울린다. (건축학개론이라는 수업과 첫사랑은 잘 어일리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의 연기도 어울린다. 첫사랑을 그리는 신인 배우들. 아마 눈에 익은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면, 그런 이야기를 그릴 수 있었을까.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처음 봤는데, 매력이 넘치는 배우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앞으로 이 영화에서 맡은 승민의 역할보다 더 맞는 역할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수지도 익히 들어서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건축학개론에서 처음 봤다. 딱 그 나이에 맞는 신입생 역할을 너무 아기자기하게 한 것 같다. 그들의 소소한 데이트 - 라고 할 수 있을까 - 였던 철길 걷기와 그들의 키스 - 사실은 뽀뽀 - 도 당분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승민이 엄마에게 “엄마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GEUSS 로고가 박힌 흰 티의 초고속세탁을 부탁했던 장면이, 결국 서연 앞에서 GUESS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의 자괴감 혹은 모욕감을 느끼며 도망쳤던 모습은 왠지 마음을 저미게 했다. 그녀가 술 취해 학교 선배와 함께, 자취방으로 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실망하여 집(정릉)에 돌아가는 택시를 잡으려 하지만, 정릉을 외면하던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을 보며,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가 생각났다.


음대생이었던 서연에게, 건축학도 승민은 나중에 집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연(한가인)은 고향인 제주도에 지을 집을 부탁하기 위해서 - 라기보다는 승민을 만나기 위해 - 승민(엄태웅)의 건축사무소를 찾아간다. 영화의 시작은 이 장면이지만, 시간 순서로는 하반부에 속한다. 그리고 집을 지으며, 과거를 떠올린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기에, 그들의 사랑은 정말로 첫사랑으로 끝맺는다.


건축학개론에서 나타난 첫사랑의 언어는 노래 - 가령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라던가, 강의실과 캠퍼스 등. 이 영화에 공감을 했더라면, 이런 소소한 부분을 잘 읽어낸 영화의 성실함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건축학개론 (2012)

8.6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조정석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18 분 | 2012-03-22
글쓴이 평점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첨부. 별로 영화와 관련은 없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