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1.02.18
  2. 2011.01.28 세상의 중심에서 감사하기 2
  3. 2011.01.23 임의 침묵
  4. 2010.12.27 감사 3
  5. 2010.12.20 침묵 2
  6. 2010.12.13 미약했던 1월 2
  7. 2010.12.01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을 생각해 본다.
  8. 2010.07.05 보고 또 보고
  9. 2010.05.17 후회의 종류
  10. 2010.04.28 꽃 피는 봄이 오면
단상2011. 2. 18. 14:01

가슴에 서슬 퍼런 멍이 슬프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가슴 답답함.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당분간은 이 구멍을 메꾸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내재된 열등감이
한 순간 밖으로 뛰쳐 나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어찌보면, 이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마음의 짐.
하지만 꼭 치유 받아야 하는 마음의 상처.
가슴에 서슬 퍼런 멍이 아리고 또 시리다.


궁상 맞게 싸이에는 쓸 수 없는 글.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1. 28. 01:04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2005년에 친구와 학교에서 봤던 영화. 차암 재미있게 봤던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아키가 가고 싶어 했던 세상의 중심은 호주의 울룰루라는 곳이란다.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 그래서 검색해서 찾아봤다.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의 중심에 관한 것이다.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지는 울룰루라는 곳으로 가서 사랑을 외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사랑을 외치기 위해 내가 서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씀.

 

 사실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자꾸 자꾸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이 동요가 생각나긴 하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하지만 인정해야 할 다른 한가지가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면,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곳도 세상의 중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다른 사람도 생각하라는 것이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빚진자 의식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관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 사실 지난 여름 특새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우리는 빚진자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 즉 권리를 주장하는 채권자보다는 빚진자인 채무자의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 채무자는 어떻게 하면 빚을 갚을까 하는 낮아진 마음을 갖는다.

 

 많이 알고 있 듯,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9시, 12시, 3시, 5시에 온 사람에게 똑같이 품 삯을 주는 것에 대해서 혹시 분개 하지는 않았는지. 그 이유는 내가 9시 포도원의 품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5시 포도원 품꾼이라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황송할 것이다. 우리는 9시 포도원 품꾼처럼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5시 포도원 품꾼의 마음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권면도 설교 내용 중의 하나였다.

 

 우린 때론 관계에서 채권자 의식을 갖음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고, 그로 인한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 실망이라는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해준 것 보다, 내가 상대로부터 받은 것이 작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일 게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이 상대에게 불순한 의도 - 즉 내가 이 정도를 해주고,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는 - 로 무언가를 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상대에게 행함 자체에 기쁨이 있었다면, 절대로 내가 해준 만큼 못받아도 실망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서 항상 우리는 기대와 실망을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럴 때가 많이 있다. 어떤 때는 일체의 기대감과 혹시라도 모를 실망감을 피하기 위해 많은 관계를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삶, 정말로 피폐해질 것이다. 결론은 상대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든 대가를 바라지 말고, 진심으로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오늘 아침부터 했던 생각.

 

# 성경책을 잃어버린 유익

 

신앙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성경책을 샀다. 선교 며칠 전에 잃어버려서, 완전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정신을 어디에 놓기에 성경책을 잃어버릴까. 어쨌든 그동안 임시방편으로 홀리 바이블 어플만 보다가, 마침 오늘 교보에 갈 일이 있어서 성경책을 샀다. 굿모닝 성경인데 예쁘다. 뭐 성경책이 예쁠 필요가 있겠느냐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성경책을 사러 같이 갔더랬다. 적당히 큰 성경책과 미니 성경책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그래, 미니 성경책은 이동 중에 보는 것은 좋긴 하지만, 평소에 읽기에 불편 하니까, 조금 더 큰 성경책을 사야겠다. 그래, 이걸루 낙찰!" 했는데, 친구가 미니 성경책을 선물해줬다. 성경책 열심히 읽으라며, 선물이라며. 역시 신학생 친구라서 그런지. 정말로 감사했다.

 

 그리고 최근 성경책이 없던 내게 성경책을 사줄 챈스를 잡았지만, 그 (생색) 챈스를 잃어서 아쉬워했던 분ㅋㅋ께도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 또 감사했다.

 

 성경책을 잃어버린 유익은 감사를 느끼게 하는 것이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리고는 정말 심하게 자책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잃어버린 것도 감사하다.

 

 또 한가지 생각한 것은, 내가 성경책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교회? 동대문? 진수네 집? 지하철? 부동산 집? 잃어버린 날 동선이 대략 이 정도 인데. 어디에서 잃어버렸던지, 그 성경책이 꼭 필요한 사람이 주워서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성경책이 성경책이 필요한 사람의 기도 응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늘 들었기 때문이다.

 

# 오늘 한 커플과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 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은 없었지만, 학교에서도, 요즘 교회에서도 항상 커플들 사이에 낑겨 있어서, 너무 익숙해져 있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같이 마커스 집회에 갔다는데, 정말 좋았다.

 

 성경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었는데

 

출애굽기 14장 8절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바로는 처음부터 완악했던 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완악하게 만들었던건데.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분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완악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의 열재앙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단어이다.

 

왜 도.대.체.

 

 본인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말로 의지할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과 자신의 완전함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즉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는 홍해, 뒤에는 완악한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를 위하여 싸운다고 하셨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또 다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갈라진 홍해에 따라오게 만들었고, 그 홍해에 애굽의 군사들은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된다. "이 또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시다." 라는 것을 집회 때의 느낌을 완전히 살려서 쓸 수는 없지만. 집회 때 깨달았다. 하나님은 나쁜 분도, 실수하시는 분도 아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내 믿음이 아니라.

 

# 아 졸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쓰다 보니까 또. 지난 며칠 동안 생각했던 아이템을 한꺼번에 오늘 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오늘 아니면, 다시는 이 느낌으로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실 아까 생각했을 때 바로 썼어야 했는데.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1. 23. 23:35

# 오늘 하루, 또 임의 침묵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다. 비록 지지리 궁상이지만, 뭔가 아쉬움이 깊다. 우리의 만남들, 하나님께서 깨알같이 계획하셨었고, 이 모든 만남들의 헤어짐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을 것이지만, 만남도, 사랑도, 이별도 사람의 일이라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진다. 분명,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기는 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었다. 정말로.

 

작년 한해 동안, 가장 힘이 된 사람들. 힘들 때 가장 많이 의지 했던 사람. 가장 격려 해준 사람들, 너는 이상하게 잘 될 것 같다는 사람. 기도해 준다는, 기도해줬던 사람들. 가장 자주 만났던 사람들. 가장 연락을 자주 했던 사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줬던 사람들. 또한 기쁨을 선물 해주고 싶었던 사람. 정말로 기쁨이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사실 내가 더 기뻐서 한 거였다.

 

어쨌든 다시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이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어야지.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기때문에.

 

음. 근데 지지리 궁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시간이 지나. 후나, 너 그 때 그랬었어, 그러면, 나는, 네? 제가 언제요?, 이러면서, 제일 먼저 적응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임의 침묵
                          한용운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나이 듦에 대한 수학적 고찰

 

 사실 해가 바뀌면서 부터 쓰려고 했던 글인데, 누가(?ㅋㅋ) 이미 나이에 대한 고찰을 써버려서, 왠지 이 글을 쓰는 나는 따라쟁이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명백한 표절이군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핍박을 무릅쓰고라서도 써봐야겠다. 왜냐면, 이것은 분명, 작년 부터 생각했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이제 27이다. 빠른 86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26이긴 하다. 그래도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친구들이 27이기 때문에, 나도 비자발적으로 27이라고 해두겠다.

 

어느 때인가 부터, 나이 듦에 대해서 둔감해졌다. 어린 시절에는 해가 바뀌면 뭔가 아쉽고, MBC 가요 대상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쓸어 안았더랬다. 하지만, 이제 해가 바뀌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거나, 뭐 해가 바뀐다고 삶이 갑자기 크게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 12월 31일이나, 2011년 1월 1일은 하루 차이일 뿐인데, 왠 호들갑일까 하는 생각들.


왜 어릴 때는 해가 바뀌면, 아쉽고, 또 아쉽고, 뭔가 새로운 계획도 짜보고 했었지만, 왜 나이가 들 수록 나는 둔감해지는 가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왜 일까? 이를 수학적으로 풀어봤다. 음 수학이라기 보다는 산수라고 해둬야겠다.

 

먼저, 증가율로 풀이해봤다. 예를들어, 1살에서 1살을 더 먹으면 2살인데 이때의 증가율은 (1/1)*100 = 100% 이다. 어린 시절에는 해가 지나는 만큼 키도 크고, 생각도 쑥쑥 커버린다. 2살에서 3살로 증가할 때는 (1/2)*100 = 50% 이렇게. 음 작년 나의 나이가 26이었으니까, 올해 내 나이의 증가율을 계산해 본다면, (1/26) * 100% = 3.84% 증가했다. 어쨌든 나이 함수는 증가는 하지만, 증가의 폭은 감소하는 함수이다. 이것을 보고 체감한다고 경제학에서는 표현한다. 맞나?ㅋㅋㅋ 이미 수 차례 언급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같이, 증가는 하지만, 증가하는 폭이 점점 줄어 드는 그런 함수 말이다.

 

어쨌든 수학적으로 풀이해보면, 이렇다는 것이다. 점점 나이 듦이 익숙해져가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면, 지금이 좋기 때문에, 지금의 안정성을 깨뜨리기가 싫기 때문에.

 

예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서, 지식의 증가가 어린시절에는 스폰지를 흡수하듯이 쑤욱 증가했지만, 요즘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는, 그래서 어린 시절에 공부하는 것이 저엉말 중요한 것 같다는. 경제학을 둘 다 공부했기 때문에, 일단 지식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지만, 비록 증가의 폭은 적지만, 분명 증가는 하고 있다. 즉 평균적으로 지식은 분명 증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라는.

 

새해의 첫 다이어리가 개소리 한 움큼이군.

 

# 올해의 나는 어떨까. 정말 앞을 내다 볼 수 없다. 괜히 뒤쳐진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올해 갑작스런 도약이 있을지, 혹은 3.84% 정도만의 성장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쓰러기조 넘어저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강한 팔로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매 순간 소망 잃지 않고, 살아가야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12. 27. 00:28

# 어제 너무 피곤해서 12시 전에 자리에 누웠다. 정말 단잠을 잤다. 푹 8시까지 잤다. 그 때 일어나서 바로 빨래를 했어야 했는데, 침대에서 한참을 빨래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8시 15분에 빨래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빨래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나가야 하는 시간을 계산 못하고 무턱대고 돌렸다. 다행히 세탁은 다 되었고, 헹굴 때 알게 되어서, 급탈수 후. 지금 다시 헹구고, 탈수 대기중! 기숙사에 살다보니깐, 이런 일들도 생기네.

 

# 오늘 GBS 주제는 허영이었다. 또 허영빼면 시체인 나. 이렇게 글쓰는 것도 어쩌면 허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영에 대해서 많이 나눴다. 하나님의 인정과 사람의 인정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리고 사람의 인정에 더 갈급했던 나의 모습. 사람의 인정은 거기에 그치고, 하나님의 인정에 대한 상급은 하늘 나라에 쌓일텐데, 나는 땅에 쌓일 것만 바라보며 사는 그런 사람. 물론 하나님 인정, 사람의 인정 모두 다 받으면 좋긴 하지만. 음. 그런데 인정을 받는 다는 것. 인정을 받게 되면 교만해지는게 하나의 코스이다. 그 코스를 잘 벗어 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팀 모임때, 감사의 제목들을 나눴었다. 내가 올 해 감사할 것들이 뭐였나. 사실, 실패로 점철된 올 해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감사할 것들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올해의 타이밍은 차암 절묘하다. 6월을 기점으로 올 해 내 삶이 조금은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6월 부터 리더를 시작한 거? 맞다. 그거다. 그런데, 6월 전까지는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목표로 한 것들, 물론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나의 노력 이상으로 열매를 맺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능.력.과 의.지.로 말이다. 물론 그 중에 실패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소소한 실패들은 나에게 겸손이라는 것들을 알려주기에 너무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예배 때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고난이 없었던 사람 있었는지, 손 한번 들어 보라."는 질문에, 나는 장난스레 손을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차암 교만했던 나의 모습이었다. 장난으로 손을 들긴 했지만, 하나님은 교만했던 나의 모습을 보셨다.

 

그리고 6월 이후 이상하게 리더를 하면서부터였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해석이지만, 그 이후에, 뭐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 진게 없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아까 썼던 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의 노력으로 이뤄왔던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가 날기 시작하니깐, 정말로 배가 떨어졌다. 취업에서부터, 말 할 수 없는 이것 저것. 내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 진게 없는 것 같다.

 

새삼, 나의 능력 없음을 그리고 예전의 나의 교만을 떠올리며, "나는 정말. 정말. 되는일이 없구나.(미약하구나)"라는 말 밖에 안나오는 것 같다. 물론 그 모든 시간이 겸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 같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마음 속에 주인 삼은 것들을 내려 놓으라는 뜻 같기도 하다. 지금은 내가 해석을 더 잘 못하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정말, 내년에는 정신차렸으면 좋겠다. 올 해 너무 힘들었거든요ㅠ.ㅠ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읽다가,

 

36쪽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믿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좌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하려면 아예 교만하십시오! 교만하는 것은 좌절하는 것보다 신앙이 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하는 것은 진실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과 절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는 결코 절망이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그것은 구원 자체가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무엇을 했다거나, 내가 협의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구원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의 제목을 찾자면, 그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찬양과 예배를 통해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신 것. 그리고 정말로 사랑하는 11진 2팀의 지체들을 통해서도. 이게 감사의 제목이다.

 

물론 취업 안된거, 그거 하나로 무슨 좌절이냐, 호들갑떨지 마라,고 얘기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내 인생에서 이와 같은 실패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팀모임때 얘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인데, "아, 리더 하면서부터 되는 일이 없었네요. 그래도 내년에 주실 것들 생각하며, 미리 감사하네요." 하고 끝마쳐서.

 

#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이란 무엇일까.

 

사실 예전에는, "순수한 그런 믿음인가? 그럼 순수한 건 뭐지? 에잇. 나는 하나도 순수하지 않는데ㅠ.ㅠ"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그런데 수요 예배 때, 목사님께서 두 가지 얘기를 해주셨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아빠, 요즘 힘드시죠? 제가 오늘 학교 마치고, 돈 촘 벌어 올게요. 그러니 용돈 주실 걱정은 안하셔도 되요."

 

이런 아이와

 

"아빠, 과자 사먹게, 용돈 좀 주세요. 나한테 용돈 줄 사람은 아빠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달라고 하면 주실꺼잖아요. 아빠만 믿어요."

 

두 아이 중에, 후자의 아이가 정상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후자의 믿음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 이렇게 글 쓰는거. 오늘 GBS때 했던 허영이 아니길. 허영과 허세로 가득한 나의 모습. 이 글 속에도 나의 허영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 빨래 다 헹구고 탈수도 완료! 이제 빨래 널고 빨리 자야지. 내 특유의 전형적인 용두사미의 글. 하지만 이번에는 사두사미! 빨래로 시작해서, 빨래로 마쳤다. 이건 수미상관. 수미상관이란 "시가에서 첫 연을 끝 연에 다시 반복하는 문학적 구성법" 아. 나의 문학적 재질이여. 문학 소년!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12. 20. 01:11

#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해야할 일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침묵도 우리가 해야할 일들 중의 하나이다. 침묵해야 비로소 들을 수 있다.

 

반면 시끄러운 곳에 가면, 사고하기를 멈추기도 한다.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클럽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일탈을 원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냥 시끄러운 그 상태에 머물기만 하면, 생각을 피할 수 있다. 시끄러운 곳에서 온전한 생각을 하기는 여간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이 시대. 침묵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 미디어, 핸드폰 등. 조용히 생각하게 하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 때로는 세상이 우리를 미혹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끊임 없이 시끄럽게 하는 것.

 

조용히 있으면 불안해 지는 시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침묵 속 에서야 참 나를 만날 수 있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나를 말이다.

 

# 고요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눈이 내리던 금요일 새벽,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 한편이 생각 났다. 왜 그날 이 시가 생각났는지는 모르지만.

 

임의 침묵
                          한용운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도대체 만해 한용운은 어떻게 이런 시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천재다 천재. 읽을 수록. 이 시의 임은 조국, 부처님, 혹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일 수도 있다. 이런 비유와 상징이 정말 좋다. 그냥 써놓고, 임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둘러 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도 이걸 노리지 않았나 싶다.

지금 나의 임은 누구 일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그건 저도 대답 못해요. 왜냐면 저도 모르니까요. 알아도 대답 못해요. 중요한 것은 임은 갔지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대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산책하시길. 아. 정말 써놓고도 오그라든다. 왜냐면 지금은 감성이 충만한 새벽 1시. 내일 진짜 이건 부끄러워서 다시 지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시절. 이 시를 입시용으로 배우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 시절에 배웠던 이런 소소한 것들이 나이 들어서 생각나고, 이러한 것은 나름대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학교에서 쓸데 없는 것들을 배우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 쓰고 보니, 제일 위에 있는 침묵은 나의 침묵이지만, 위 시의 침묵은 당신의 침묵이다. 나의 침묵은 정당한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사랑하는 나의 임이 침묵한다면, 답답해 죽겠지? 하지만 임의 침묵도 신뢰해야겠다.

 

# 문득 오늘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왜 떠오른거지.

 

# A안과 안이 있다. (A와 ㄱ으로 쓴 것은 둘 중에 한 가지가 우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다 동등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한 가지가 절대로 열등한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A와 ㄱ으로 써봤다.) 둘 다 잘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둘 다 좋은 기회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왠지 A를 선택하면 ㄱ을 회피하는 느낌이고, ㄱ을 선택하면, A를 회피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선택해도 마음이 편지 않을 것 같은 마음. 결론은 나는 김칫국을 너무 잘 마신다는 거다.


# 이 글의 결론은. 결국 내가 지금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성 충만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보고서와 빨래 때문이라는 것. 물론 후자가 더 큰 이유다. 빨래 후. 이제 널고 자야겠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12. 13. 22:59

 2010년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올 한해, 내가 어떻게 지내왔나 돌아 보려 한다. 일단은 시간 순서대로 시작하려고 하는데, 글의 방향을 어떻게 될지도. 그리고 글이 이어질지도 잘 모르지만, 일단은 써봐야겠다.

 

# 미약했던 1월

 

 송구영신 예배 드리고. 나래, 은성, 경민과 함께 말 그대로, 새 해를 보기위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차산으로 갔다. 눈이 많이 쌓였고, 많은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해뜨기 전에 해가 잘 보이는 명당에 갔어야 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붐벼서, 발 디디기도 힘들 지경. 결국 해는 못보고, 사람들 머리구경만 많이 하고 왔다.

 

 내려 오는 길에, 한 살 더 먹음을 떡국을 먹음으로써 가장 먼저 내 장에게 알렸다. 떡국을 먹고, 전날 이사한, 하숙집에 가서, 숙면을 취했다. 숙면을 취한다는 게, 정확히 몇 시간인지는 몰랐지만, 15~20시간 정도는 된 것 같다. 물론 중간에 한번은 깨기도 했었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숙집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원래는 방학 때도 기숙사에서 살 수 있는데, 기숙사 개보수 때문에, 나가야했다. 그래서 급하게 잡은 하숙집. 월 25만원에, 한 달 반 동안 30만원에인가. 살기로 쇼부 보고 구한 하숙집이다. 원래 계약은 한달 단위로 하는데, 방학 동안에, 어차피 비워질 방이 채워져서, 하숙집 아주머니는 좋고, 나는 딱 한 달 반정도만 살 거처가 필요했는데, 서로의 계약이 급체결되었다.

 

 음. 그런데 입주(?)하고 보니깐, 왜 방학 때 방이 비워져 있는지 알겠더라. 너무 추웠다. 방에서 숨을 쉬면 입김이 나왔다. 게다가 따뜻한 물도 잘 안나왔다. 아침에 머리를 감는데, 손가락도 얼 뻔, 머리도 얼 뻔, 이러다 내 뇌도 얼 뻔. 그래도 깨끗한 척은 하니깐, 샤워도 해야하는데, 내 몸과 장기도 얼 뻔. 여튼 그랬다. 속으로 되뇌웠던 말. "ㅁㅇ러ㅐㅁㅇ러ㅏㅊㅍ" 잘 땐, 파카를 입고 잤다.

 

 방이 추워서 기침을 달고 살았다. 어느 날은 친구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일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내 거처를 유일하게 아는 친구 - 방 구할때 같이 다닌 친구 - 에게 "혹시..며칠동안나랑연락두절되면ㅋ나찾아와줘ㅋ지금내거처아는사람너밖에없는것같아ㅋ","나감기걸렸는데 ㅋㅋ혹시방에서꼼짝못하게되면ㅋ 도와줄사람이없어ㅋㅋ혹시해서..ㅋ"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문자다.

 

 집 구하는데, 같이 돌아 다녔던 친구는 나에게, 독거 노인 같다며. 방이 이게 뭐냐며, 불쌍하게(?) 쳐다봤다. 그럴 것이. 가구는 하나도 없었고, 빨래를 거실에 널 수는 없어서 - 여학생도 있고 해서 - 방에 널면, 딱 누울 공간 하나만 남았다. 그리고 이리 저리 쌓인 책들, 박스들. 도저히 방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별로 부끄러울 게 없는 것이, 어차피 잠깐 살다 나갈, 그저 임시 거처 였기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게, 최근 며 칠 전이었다.

 

 얼마전에 교회 젊은이 예배 때 들었던 간증. 우리는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한다. 좋은 것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살아가면서 맹목적으로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 잠시 잠깐, 1개월 반 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미화해본다. 그 때는 불평 불만 한 움큼 가득했었는데.

 

# 오랜만의 학교 근처 하숙 생활 여담

 

 정환 형이 밥을 자주 사주셨다. 나도 뭐 한 5번 얻어먹으면, 한번 사는 꼴로. 음 어쩌면, 5:1 그 이상 일 수도.

 

 심신이 피로했었다. 방이 추워서 항상 긴장 가운데 수면을 취하다 보니.

 

 하숙 생활 동안, 계절 학기 듣고나서, 통영 선교에 뒤늦게 참여했다. 사실 계절 학기 핑계로 안가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통영 선교 중간에 계절 학기가 끝났다. 더 이상 핑계를 댈 구멍이 없어서, 결국 끌려 갔다. 정환 형과의 바톤 터치, 정환 형은 월~수. 나는 수~금. 선교 기간에, 정말 오히려 더 잘 먹고, 잘 씻었다. 하숙집에서 많이 먹으면 2끼였는데, 선교 때, 하루 3끼 꼬박꼬박. 그리고 목욕탕에서 아침, 저녁으로 씻어서, 피부가 더 뽀송해졌다. 나는 실질적으로 목요일 사역에만 참여하고, 금요일 관광. 나더러, 놀러 온거 아니냐는 장난섞인 핀잔을 누군가 했었다.

 

 설날이 되기 전에, 방을 비워주기로 해서, 박스를 집에 택배로 보내야했다. 한 상자에 20여Kg 정도 되는데, 눈이 펑펑 오는 날, 낑낑대며, 학교의 학생회관에 있는 우체국까지 옮겼다. 3박스를 옮기고 나서, 나는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급 들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12. 1. 23:49

#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라는 속담.

 

나는 백지장은 맞들면 불편하다는 주의이다. 종이 한 장 맞드는 거.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맞들기까지야. 어쨌든 이런 생각에, 쉬운 일은 도움 안 받고 그냥 나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어려운 일 맞닥뜨려야 도움을 청하곤 하는데, 이것도 아주 미안한 마음으로 청하긴 한다.

 

어쨌든 위의 속담은 쉬운 일도 함께 하면 훨씬 쉽게 끝낼 수 있다라는 뜻인데, 나는 다르게 한번 생각해봤다. 그냥 개소리 일지도 모르지만.

 

막상 내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진짜로 도움을 주는 사람은, 백지장을 맞들어 줬던 사람인 것 같다. 아직 나름대로 짧으면 짧은 인생. 어려운 일이 많이 닥치지는 않았단 것 같긴 하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은 늘 함께 해 주던 사람이다.

 

또 샛길로 빠져 본다면, 예전에 전 목사님이 설교 하실 때, 보통의 힘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위기의 순간에 특별한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축적해 놓은 힘이 위기의 순간에 발휘 된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오래 동안 기억에 남았다.

 

위의 이야기와 구색을 맞춰 본다면, 평소에 도움을 주던 사람이, 힘들 때도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말씀.

 

그래서 말인데, 나는 도움에 인색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백(白)지장이든, 백(百)장지 - 백장의 종이ㅋ나는 언어 유희에서는 창의적인 것 같다. - 든.

 

# 오늘 예배 때, 목사님께서 믿음은 흔적을 갖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한 본문에 대해서 설교 하시면서. 흔적을 갖는다라. 후후. 어렵다. 흔적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힌 손이라던가, 창으로 찔린 허리라든가. 어쨌든 이런 고통이 수반되면, 흔적이 생기고, 그 흔적으로 인해 믿음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 삶 가운데, 뭔가 말 못할 고통이라던가. 정말 힘든 시기에 쳐해 있다면, 그 가운데 상처의 흔적이 생기고,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커지길 기도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가능 하다면, 그러한 고통은 피하고 싶긴하지만.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7. 5. 00:25
# 진정한 사랑이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런 사랑일 게다. 사실 딱 반년 전에는 진정한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글을 썼더랬다. 그냥 별 이유는 없었는데, 삭막한 하숙집에서 그냥 우울하게 노트북으로 썼던 글이다. 그런데, 반년만에 극적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위에 쓴 것 처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런게 정말 사랑일 것이다.
 
# 경제학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어이없게도 경제학적 개념을 사용해보려고 한다. 경제학을 배우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한계(marginal)라는 개념이다. 한계라는 개념은, 어떤 변수가 한 단위 변했을 때, 그에 따라 변하는 다른 변수의 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계라는 개념은 경제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그 중에서, 특히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 요즘 굉장히 더운 여름인데, 갈증이 잦다. 갈증이 있을 때 마시는 물 한잔의 가치는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런데, 물을 한잔 씩 더 마실 때 마다 그 가치(효용)는 점점 줄어든다. 물을 일정 수준 이상 들이키게되면, 급기야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즉, 처음 물을 마셨을 때 증가한 가치와, 그 이후 한잔을 마셨을 때 증가한 가치의 양은 다르다. 대게는 두 번째 물을 마셨을 때 증가한 효용의 양은 첫 번째 마셨을 때 증가했던 효용의 양보다 적다. 이는 대게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법칙이라고 명명한다.
 
# 하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리고 보고 또 봐도 또 보고 싶은 그런 경우는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분명히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위배되는 경우이다. 자꾸 볼 수록 증가하는 효용이 줄어야 할터인데, 자꾸 보면 볼 수록, 더 기분이 좋아지고, 그 사람을 알아갈 수록, 더 좋아지는 그런 경우. 이는 정말로 어떤 이를 좋아할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꾸 자꾸 생각나고, 자꾸 자꾸 보고 싶고.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그런 경우. 바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에요! 조금 오그라 들긴 하다.
 
#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계효용이 증가함을 정말 간단하게, 한 단어로 표현한 게, 볼매(볼수록 매력)인 것 같다. 반면에,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걸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정말, 보면 볼 수록 질리는 그런 사람을 표현한 단어인 갈비(갈수록 비호감). 나는 볼매일까? 갈비일까? 나는 그냥, 볼 수록 매력적이지는 않아도, 적어도 갈수록 비호감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만날 수록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고프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5. 17. 02:05
# 후회의 종류를 나눌 수 있다면, 나는 크게 두가지 종류로 나누겠다. 이건 순전한 나의 후회론(論)이다.
 
 먼저,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 하는 후회. 이런 류(類)의 후회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 느낄 수 있는 후회이다. 대게 시간이 흘러 '아 그때, 내가 OO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결국 이런 후회의 도(度)가 지나치면, 한(恨)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정적인 후회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무언가를 해서(저질러서) 하는 후회. 정말 이런 류의 후회는 할 말이 많은 후회이다. 이런 류의 후회는 대게, 짧은 기간 안에 느낄 수 있는 후회이다. 보통 이런 후회는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드는 후회일 것이다. 가끔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황을 만드는 후회의 종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후회는 동적인 후회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각각의 후회를 위험의 측면에서 설명해보면, 첫번째 류의 후회는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하는 후회이다. 그리고 두번째 류의 후회는 리스크를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후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게 어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론은 후회라고 해서 다 같은 후회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소소하지만 무언가를 저질렀을 때, 내가 발전했던 것 같고, 우리 사회를 발전 시켰던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저질러서 항상 좋은 일들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건, 25년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몇 안되는 삶의 진리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지금 이 상태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몰라도 일단 저지르라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위의 후회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나의 경우에는 올해는 위험을 회피해 후회를 줄이려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올해는 괜스리 의기소침해지고, 소심해진 것 같다. 적어도 작년에는 위험을 즐기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올해보다는 무언가를 많이 저질렀던 것 같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가, 안해서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괜히 해서 차마 부끄러워서 얘기하지 못할 그런, 손발이 로그아웃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이 교차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이런 삶들을 즐겨야 할텐데. 나는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가끔 내가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수동적으로 그냥 살아지는 것인지 모를 경우가 많다. 우리네 역동적인 삶을 사랑해야지.
 
# 16일 주일. 12시에 약속이 있었더랬다. 약속에 늦지 않으려 서둘러 준비해서 나갔다. 하지만 눈 앞에 505번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뛰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뛰었다. 결국 버스에 올라탔고, 약속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나서 느끼는 안도감(?) 보다는, 괜히 웃겼다. 최근 들어서 이렇게 빨리 달렸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축구할 때 보다 오히려 더 빨리 달렸던 것 같다. 사람에게 초인적인 힘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생기는 것 같다.
 
 버스에 올라탔다. 제일 끝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고 시원한, 그리고 더러운 서울의 공기를 맞으며, 숨을 골랐다. 그 때 생각 났던 게, 어린 시절 와 관련한 에피소드였다.
 
 어린 시절, 할머니집에 가려면, 피할 수 없는, 꼭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 있었다. 그 길 옆에 친척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지나야만 할머니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친척집에는 무시무시한 개가 살고 있었다. 그 개를 지나지 않고서는 할머니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개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항상 그렇게 지나갔던 것 같다. 만약 개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냥 줄행랑을 쳐야했다. 대게는 개가 묶여있었지만, 어린 맘에, 혹시 나를 쫓아오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노심초사를 했더랬다. 어느 날은, 개가 풀려 있었다. 그런데, 운이 없게, 개에게 들키고 말았다. 결국 나는 줄행랑을 쳤다. 정말 혼신의 힘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개를 따돌렸다. 하지만, 맘에 걸렸던 게, 뜀박질 하면서, 하필이면 신발이 벗겨졌다. 한참을 그 신발을 '찾으러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더랬다. 결국 개가 잠잠해질 즈음에, 다시 슬금슬금 신발을 찾으러 갔던 게, 버스에 올라탔을 때, 생각이 났다.
 
# Smokie의 Living next door to Alice 라는 노래가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올드팝 중의 하나란다. 나는 예전에 한참, 굿모닝 팝스를 들을 때 알게 된 노래였다. 노래도 귀에 익고, 가사가 예사롭지(?) 않아서, 가끔 생각났던 노래이다. 대충 가사의 줄거리는 24년 동안 짝사랑한 옆집의 엘리스가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엘리스의 집에 리무진이 나타나더니, 그 리무진에 엘리스가 탔고, 결국 떠났다. 그 남자는 24년 동안 엘리스에게 고백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결국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구슬픈 이야기의 노래이다. 하지만 멜로디는 구슬프지는 않다.
 
 24년 동안 고백할 기회만 엿보던 그 남자. 답답하고, 불쌍한 인간의 표상이다.
 
 외국인 친구 - 나이차이는 많이 나지만 토니가 친구라고 생각해 주길 바래서 - 인 토니와 노래방에 갔을 때 이 노래를 몇 번 불렀던 게 생각이 난다. 토니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아는지 신기해했지만. 워낙에 옛날 노래라서.
 
#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Connect the dots 라는 이야기를 했다. 과거 그의 경험들은 연결해보면 현재의 그를 만든 한 점이 된다. 그 점들은 미래로 연결할 수는 없다. 단지 뒤를 돌아볼 때만 알 수 있는 하나의 점이다. 과거의 경험 중에 하나도 쓸모 없는 것은 없다. 결국 쓸모 없다고 여기는 것도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에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학교 언어교육원에서 들었는데,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마음에 와닿는다. 한편으로는 섬뜩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늘의 '나'는 더 이상 오늘의 '나'가 아니라 이미 과거의 '나'다. 그리고 그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미래의 나를 망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그런데 나는 뭐람?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4. 28. 23:33

# 자연은 참 부지런하다. 올해만은 올 것 같지 않던 봄이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겨우내 유난했던 추위를 이겨낸 나무들은 어느새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 꽃을 피우는 이 계절. 참 좋다. 그리고 감사하다. 아니, 감사해야한다. 이렇게 좋은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음에.

 

# 봄이다. 봄 하면 생각나는 꽃은 벚꽃, 개나리, 진달래인데, 그 꽃들의 향을 코를 가까이하고 맡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 꽃들을 지나갈 때 향이 났던 것 같지는 않다. 반면에 아카시아를 지나갈 때는 아카시아 내음이 주위를 둘러쌈을 느낀다. 그래서 봄 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꽃이 아카시아이다. 나는 후각에 민감한 사람인가보다. 그리고 봄 특유의 비 온 후 젖은 나무에서 나는 내음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 학교 가는 길에 아카시아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전교생 20여명 남짓의 초미니 학교였는데,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20분 정도를 걸었던 것 같다. 그것도 지름길로 갔을 때 20분이지, 비가 많이 와서 지름길에 있는 보가 넘칠 때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는데, 그 길에서 아카시아 향을 맡을 수 있었다.

 

# 어린 시절. 산골에 살았던 시절. 그 때는 순수한 산골 소년이었다. 마을을 둘러 싼 산을 넘어가면 아라비아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미국이 나오는 줄 알았던.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순수함 혹은 멍청함. 어쨌든 나는 그런 아이였다. 오락실은 나쁜 곳이라는, 불량학생들만 가는 곳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중 2 때까지 오락실에 한번도 안갔다. 친구들이 오락실에서 놀 때, 나는 밖에서 시간을 떼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오락실 동전 노래방에서 상주(?)하면서 친구와 놀았을 정도였는데. 아마 어린 시절부터 나의 이런 재미없는 성격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 성시경의 노래 중에 1학년 1반 이라는 노래가 있다. 첫 가사가 " 가끔 유난히도 그리운 날들. 코끝에 맴도는 푸른 봄날의 향기. 싱그러운 라일락 기다리는 설레임. 기억에 입가엔 미소가. 혹 비라도 내릴까 내 어린 맘에 잠을 설치던. 이제는 아련한 소풍 전날의 추억. 깨우지 않아도 젤 먼저 잠을 깨던 철부지 일학년 일반 내 모습 참 그리워." 로 시작하는데, 나도 가끔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고 고향이 무척 그리울 때가 있다. 언제였나, 정말 유난히도 고향에 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가면 되지 왜 유난을 떠는지 말하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이제 더는 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살면서도 본의 아니게 고향을 잃어버리는 흔치 않는 그런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우리 동네에 댐이 건설되면서 고향을 잃어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고향에 가본적이 없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구나. 어린 시절에는 산골 생활을 청산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철 없는 생각이었고, 가슴이 저밀 정도로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련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특히 외로울 때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다.

 

# 집 앞에 흐르던 여우라는 이름의 냇가(여우내).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냇가의 물이 흘러 넘칠 정도로 물이 불어났고, 며칠 동안 가물면 금새 물이 흐르지 않은 냇가 아닌 냇가가 되어 생긴 이름이다. 여우같다고 해서.

 

 한 여름의 어느 날 새벽.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세상 모르고 가족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에 우리 집 앞에서 우리 가족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서 온 가족이 잠에서 깨어, 문을 열고 나갔는데, 왠 걸, 여우내가 흘러 넘쳐 물이 집 앞마당, 마루까지 물이 차 올랐다. 물살을 헤치며 그나마 높은 지대로 온 가족이 대피를 했더랬다. 비가 조금만 더 왔더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찔한 기억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이는 아마도 댐 건설로 인해 산허리가 무분별하게 잘려 나가는 등, 자연의 복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집 앞마당에는 텃밭이 있었다. 감나무, 옥수수, 고추, 고구마 등을 키웠었고, 울타리는 무궁화 나무와 은행나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함에 다시 한번 내 기억력에 감탄(?)을 해본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 즈음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답지 않다. 댐 건설로 인해 산 허리의 나무들이 잘려나갔고, 외지인들의 보상금을 노린 투기, 그리고 산골에 살아야만 했던 한창 놀 시기의 답답함.

 

# 봄 이야기를 하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꽃 피는 진짜 봄이 오려나 했다. 이번 주말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적당했던 토요일엔 야구장엘 다녀왔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남산에 다녀오려 했으나, 남산을 수면보충에 양보했다. 저녁 예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왜 이런다니. 올해 겨울은 아직도 유난을 떨고, 봄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