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2009. 4. 20. 17:07
# 1 바야흐로 시험기간이다. 시험기간에 블로그 질이나 하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중간고사 기간. 복학하기 전에, 절대 학교 다니면, 평소에 공부를 해서, 시험기간 때 무리하는 짓은 안해야 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복학 전이나, 후나 똑같다.

# 2 어쨌든, 벌써 중간고사 시험을 보는 6과목 중에서, 3과목 시험을 마쳤다. 내일은 학교 안가고, 수요일에 2과목 시험을 본다. 하하. 내일 학교 안가니깐, 벌써 마음이 설렌다. 비록 수요일의 2과목을 위해 공부를 해야하지만, 하루 푹 잠을 잘 수 있어서 - 아니 있을 것 같아서 - 좋다. 이게 시험기간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학창시절에도 시험기간이 좋았던 이유는,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갈 수 있어서였다. 물론 야자도 안해서 좋고.

# 3 대학교 와서, 이전 2년을 다니며, 족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성적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뭐, 그래도 평균은 했으니깐. 그런데, 이번에는 2과목의 족보를 구해서 봤다. 내가 구한 것은 아니고, 친구가 구해줘서, 나도 덕을 봤다. 나의 인적 네트워크가 뛰어나서 구한 것은 절대 아니었고, 인맥이 좋은 친구와 친하게 지내다 보니, 어부지리로 나도 덕을 본 것 같다. 그 친구에게는 감사할 일이다.

# 4 얼마 전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님께서, 대학생들이 족보를 보고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개탄을 하셨다. 개탄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남들 다 보는 족보를 안 볼 수도 없는 입장이다. 아니, 안 볼 수는 있지만, 상대평가 하에서, 다른 학생들이 접하는 정보를 내가 접하지 못한다면,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 주식시장과 비교하자면 -효율적 시장 가설에 의하면 - 모든 정보가 시장에 반영된 것이 현재의 주가이지만, 정보를 접하지 못한 사람은 덥썩 미끼를 물어버리게 된다. 음. 그러니깐 쉽게 낚인다는 말이다.

# 5 하지만 족보를 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이게 진정한 공부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진정한 공부라는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족보를 보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시험성적으로 평가된 점수가, 나의 진정한 공부의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럼 진정한 공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 6 그럼 족보를 보고 공부했던 결과는? 일단 재정학 과목에서는 나름대로 선방을 했다. 족보를 구하고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때문에, 실수를 많이 했다. 그리고 노동경제학 과목은 그냥 대충 문제 유형만 눈에 익히고, 풀어보지는 않았다. 시험은 족보보다 훨씬 쉽게 나와서, 만점자가 속출할 것 같은 느낌이다. 기말고사에 사활(?)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족보를 보고서, 공부를 대충했다가 큰일 날 것 같아서, 어제 새벽 4시까지 책과 씨름을 했었는데 - 결국 덕분에 기상시각은 10시로 늦어졌지만 - , 시험은 너무 허무하게 쉽게 출제되었다.

# 7 언제쯤, 나는 시험 성적에 해질 수 있을까? 시험 성적에 너무 연연하는 모습이 갑갑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험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공부를 하고 싶다. 하지만, 시험을 안보면 공부 자체를 안한다는.

# 8 이제 3과목 남았다. 수요일에 2과목 시험보고, 또 목요일은 쉬고, 그 다음주 금요일에 시험. 일단 수요일만 잘 지나가면, 중간고사가 다 끝난 기분은 낼 수 있겠다.

# 9 오늘은 미드 한 편 보고 공부해야겠다. 시험기간 중의 여유! 혹은 수요일 시험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09. 4. 11. 14:39

# 1 요즘 어디를 가도 만개한 벚꽃을 볼 수가 있다. 이제 봄인가 보다. 올해도 봄이 오긴 왔구나.


# 2 며칠 전, 학교 점심 방송시간에,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카시마 미카의 櫻色舞うころ(연분홍빛 춤출 무렵)이 흘러 나왔다. 포지션이 리메이크했던 하루라는 곡의 원곡으로 유명하다. 어쨌든, 12시에 시작하는 강의 가운데 약 4분이었던가, 이 곡이 흘러 나왔는데, 도무지 화폐경제학 강의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선곡 센스는 좋았지만, 그 센스 덕분에 강의시간의 일부분을 놓쳤다. 그래도, 봄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 3 전국 곳곳에 연분홍빛이 춤추고 있다. 혹자는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벛꽃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성행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예쁜건 예쁜거다.


# 4 음. 올해는 여의도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벛꽃 축제에 갈까 생각 했었는데, 음. 시험의 압박이. 음. 압박은 있지만, 공부는 안된다는.

# 5 어쨌든, 봄은 연분홍빛 벛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櫻色舞うころ(연분홍빛 춤출 무렵)
 
櫻色舞うころ 私はひとり
벚꽃이 춤추며 떨어질 때, 나는 홀로
押さえきれぬ胸に 立ち盡くしてた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마음으로 계속 서 있었어요 (봄)

若葉色 萌ゆれば 想いあふれて
새싹이 싹트니 그대를 향한 마음이 흘러넘쳐
すべてを見失い あなたへ流れた
모든 걸 놓치고, 그대에게로 흘러갔죠 (여름)

めぐる木木たちだけが ふたりを見ていたの
시간이 흘러 변해가는 나무들만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ひとところにはとどまれないとそっとおしえながら
같은 곳에서는 머무를 수 없다고 살며시 가르쳐주며…

枯葉色 染めてく あなたのとなり
나무들이 마른 잎 빛으로 물들어 갈 때, 그대의 곁에 있어요
移ろいゆく日日が 愛へと變わるの
변해가는 날들이 사랑으로 변해요… (가을)

どうか木木たちだけは この想いを守って
부디 나무들만은 이 마음을 지켜주길!
もう一度だけふたりの上で そっと葉を搖らして
다시 한번만, 우리 둘의 머리 위에서 살며시 나뭇잎을 흔들기를…

やがて季節はふたりを どこへ運んでゆくの
결국 계절은 우리 둘을 어느 곳으로 데려 가나요?
ただひとつだけ 確かな今を そっと抱きしめていた
단지 하나뿐인 확실한 지금을 살짝 껴안고 있었어요

雪化粧まとえば 想いはぐれて
눈으로 세상이 하얗게 되면, 그대를 생각할 기회를 놓쳐요
足跡も消してく 音無きいたずら
발자국도 지워가는, 소리 없는 장난… (겨울)

どうか木木たちだけは この想いを守って
부디 나무들만은 이 마음을 지켜주길!
「永遠」の中ふたりとどめて ここに生き續けて
「영원」속에서 우리 둘을 머물러 있게 해주기를… 여기에 계속 살게 해주길…

めぐる木木たちだけが ふたりを見ていたの
시간이 흘러 변해가는 나무들만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ひとところにはとどまれないとそっとおしえながら
같은 곳에서는 머무를 수 없다고 살며시 가르쳐주며…

櫻色舞うころ 私はひとり
벚꽃이 춤추며 떨어질 때, 나는 홀로
あなたへの想いを かみしめたまま
그대를 향한 마음을 깊이 생각하며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09. 4. 2. 23:25

 요즘 조금 피곤한 생활을 했더니, 눈 밑에 다크써클이 생길 조짐이 보인다. 음. 왜 피곤한 생활을 하냐면, 열심히 생활해서라기 보다는 '밤에 잠이 안와서' 이다.( 이건 뭐?) 외로움에 잠을 못자는 건가? 이건 아니다. 그냥 잠이 안온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보면. 요즘엔 몸은 굉장히 곤한데도,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오질 않는다. 이런일이 최근 일주일동안 반복 되고 있다. 지난 토요일에 몰린 피로를 한꺼번에 해소하느라, 잠을 미친 듯이(?) 잤는데, (아니. 죽은 듯이가 맞겠구나.) 그 이후로, 밤에 제시간에 잠을 못자고 있다. 그래도 일어나는 시간은 매일 같은데.

 주위에 보면, 만성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크써클이 눈가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크써클은 하나의 콤플렉스일 수도 있다. 다크써클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한가지로 수면부족이 있다. 생각해보니, 내 주위에 다크써클이 떠나지 않거나, 짙은 사람들은, 뭔가 자신의 일들을 굉장히 열심히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냥 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지만.
 
 그러므로 다크써클에서 아름다움을 찾자면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만 생기는 훈장?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09. 3. 29. 10:42

 오늘 씻으면서 문득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실 어제 조금 과음을 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마신 듯 하다. 다른 사람들 기준으로 봤을 때, 내가 마신 양은 미미한(?) 수준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과음한 덕분에, 속이 조금 안좋고, 머리도 살짝 "띵"하다. 새벽 1시쯤에 잠을 자서, 6시쯤에 일어났다. 앞으로 다음 날 일찍일어나야 할 일이 생기면 술을 많이 마시고 볼일이다. 음. 생각해보니, 어제 2차를 간다고 했는데, 안가고 몰래 빠져나오길 잘한 것 같다.

 술자리를 별로 안좋아해서, 술자리에서 술을 안마시거나, 술자리에서 빠져나온다거나 하는 일에는 약간 도가 튼것 같다. 사람들은 왜 맛없는 것을 먹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시고 나면 속이 쓰리기도 하고, 머리 아프기도 하지만, 항상 이렇게 말을 하는 나도 마시기는 하니,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나에게는 술을 마시고 이내 몇 잔 후면 효용이 마이너스가(마실 수록 고통이 되는) 된다. 음.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왠지 즐거운 술자리다 싶으면 더 마시게 되기는 하지만,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는다.

 음. 술자리에 가게되면 항상 나오는 질문은, 주량이 어떻게 되느냐이다. 나의 경우는 술을 취할 때 까지 마신 적이 없어서, 주량을 잘 모른다. 술을 잘 마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되면 스스로 자제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왠지 술에 취해 비이성적으로 바뀌는 - 정신줄을 놓는 -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기는 하다. 어쨌든 주량 얘기를 하면 은근히 자존심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내가 술을 안좋아 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그러면 앞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려고 그러느냐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 얘기를 조금 확대 보자면 '사회생활=술자리', 즉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생활 부적격자인 것 같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봤다. 누군가와 밥을 먹으러 가면, 당연하다는 듯이 술을 시킨다. 그리고 어떤 모임을 하게 될 때 호프집을 가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밥을 먹을 때 술을 마시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그리고 모임을 가질 때 호프집으로 가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인가? 뭔가 나에게는 어색한 행동이다. 내가 술을 시킨다거나, 호프집에 가자고 주동하는 건.
 
 일본 드라마를 보게되면, 유독 캔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여러명이서 마신다기보다는 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 같다. 내가 그 중에서 멋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별거 아니지만, 롱 베케이션에서 기무라 타쿠야가 밤에 집에 들어와서, 티브이로 야구를 보며 캔맥주를 마시는 장면이다. 왜 이게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음. 누가 보면 변태인 줄 알겠다. 

 그리고 최근에 본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회사일을 마치고 나서, 집에 들어가 마루에 누워 맥주를 마시는 장면도 뭔가 구미를 당겼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에는 오랜만에 평소에 좋아했던 남자와 데이트 약속이 있었는데, "데이트. 데이트. 데이트" 하고 혼잣말을 하고 다니다가, 일을 마치고 퇴근시간에는 어느새 "비루. 비루. 비루"로 바뀌어서, 자기도 모르게 데이트 약속장소로 안가고, 집으로 가버린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엄청 웃었었는데.

 아마 내가 일본 드라마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는, 혼자 마시는, 하루를 정리하는 뭔가 특별한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나만의 생각일 지도 모르지만. 아. 그런데 사람들은 왜 진짜 술을 마시는 거지?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술을 악마의 선물로 묘사했던 것 같다. 모두 술은 적당히 마셔요!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09. 3. 11. 21:48

악수를 나눈 뒤 나는 걸어 나왔다. 울타리에 이르기 전에 나는 무슨 생각이 나서 돌아섰다.

"그것들은 썩어빠진 인간들이오."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해놓은 것보다 낫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의 이 문구가 오늘 갑자기 정확히는 아니지만 머릿 속에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개츠비는 정상인인가? 비정상인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판가름할 정확한 잣대는 없겠지만, 그냥 궁금했다.

 

 그냥 나만의 생각일 지는 모르지만, 위의 문장을 보고만 유추해 볼 때 개츠비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못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썩어빠진 인간들은 개츠비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츠비는 사람들로 부터 제대로 인정을 못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는 비정상인 사람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개츠비는 저택에서 파티도 자주 열고, 많은 사람들이 개츠비의 저택에 모여들어 파티를 즐겼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개츠비에 대한 평가는 멋대로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개츠비는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 파티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개의치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리고 문득.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다. 정말 정말 오만한 생각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닉이 개츠비에게 말했던 것 같은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09. 2. 14. 15:20

샤르트르(J.P.Sartre)


 
나의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죽음은 타자들의 것이다. 나의 죽음은 나를 판단하는 타자의 의식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나의 삶에 부여해준다. 따라서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들의 먹이감이다.

 샤르트르가 했던 이야기인데, 음.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고서 메모한 내용이다. 최근 많은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이 메모가 떠올랐다. 용산 참극, 강호순 사건, 그리고 최근 화왕산 억새제에서의 안타까운 죽음.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란 없다. 작년에는 안재환, 최진실의 죽음. 하나 같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죽음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고 실망스러움을 많이 느꼈다. 연예인의 자살이 보도 되었을 때는, 이와 관련한 법을 입법해야 한다, 아니다 라는 주장으로 대립각을 이루었고, 용산 참극 또한 마찬가지로 정당한 수단이었다며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권을 향한 공격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최근 또 괴상한 뉴스를 접했는데, 강호순 사건을 적극 이용해 용산 참극을 무마하라는 여론몰이 이메일 지시를 청와대 직원이 보냈다라는 정말 어이 없는 뉴스를 모두 보았을 것이다. 정말 이런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궁금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자의 행패를 부린 것이다. 분명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언론에 밝혀 진 것이 전부가 아닐테니.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속아 왔을까, 혹은 모르고 지내왔을까.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에는 이탈리아 아기의 일화가 나온다. 이 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구조대원이 손을 쓰지 못하는 동안 이탈리아 전체가 아이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시시각각 발표되는 속보에 귀를 귀울였다. 그 사이에 레바논 사람들은 꾸준한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난리 가운데에서도 우물에 빠진 이탈리아 아이의 운명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바로 몇 마일 옆에서 사람들이 전쟁과 테러가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데도, 베이루트 기독교 지구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이탈리아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가 구출되자 기독교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숫자다."란 말을 했다. 테러보다는 환경 재앙이 사람의 목숨을 더 많이 앗아가지만 우리는 테러에 더 분노를 한다. (이것도 또한 블랙 스완에 나온 내용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의 경중(輕重)을 은근히 따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부끄럽지만 최근 용산 참극으로 인한 시민들의 죽음에 다른 뉴스보다 더 크게 분노 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있는 자의 행패는 이제 그만 부려야겠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