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52건

  1. 2011.03.27 아프니까 청춘이다 2
  2. 2011.03.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
  3. 2011.03.18 아프니까 청춘이다
  4. 2011.03.07 소유냐 존재냐
  5. 2011.03.04 시계, 거울, 창문
  6. 2011.02.18
  7. 2011.01.28 세상의 중심에서 감사하기 2
  8. 2011.01.23 임의 침묵
  9. 2010.12.27 감사 3
  10. 2010.12.20 침묵 2
2011. 3. 27. 01:31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픈 청춘들이 많나 보다. 지나가다, 유심히 이 책을 찾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더라. 약간 푸르스름한 색깔이 있는 책이라면, 거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들고 있는 사람이다. 괜히 이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끼리 마주치면 민망할까봐. 나는 가방에 넣어 놓고 다녔다.

 

 현재 왜 내가 아픈지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물론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프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삶에서 청춘이라는 시기는 가장 싱그러운 시기이기도 하지만, 한 치 앞을 몰라, 발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지. 과연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뒤 돌아 보기에도 버거운 그런 시간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사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책을 작년 이 맘 때 즈음에 봤더라면,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언제부터 아팠냐면. 음. 나도 한 번에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취업이 안 될 때 부터, '과연 내가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인가. 나는 왜 태어난 건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뭐 그 전에도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내 인생에서 뭔가를 가장 내 뜻대로 하지 못했던 때 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또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 시기에 정말 많은 위로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의외로 많구나 - 물론 나 혼자 하는 생각인지도 몰랐지만 - 하는 생각을 하니, 나름대로 감사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그 즈음에 했다. 그런데 어디서 나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내게 이 책은 위로를 주었다. 아파도 된다고,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아. 아파도 된다는. 많은 청춘들이 공감할 만한, 사랑도, 취업도 모두다 쉬운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아픈 사람이 많고, 이 책의 저자인 김란도 교수님도 청춘 때는 아팠다고. 그래서 괜찮다고. 특히 이 책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쓴다는 마음으로 썼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쓰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부분들.

 

 화살파종이배파 젊은이들 이야기. 사실 나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표가 확고한 화살파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정말 막연한 시간에, 불확실성에 몸을 맡기는 종이배파로 바뀌었다. 화살파는 삶을 최단 경로로 움직이려고 하는 사람. 종이배파는 목표가 불확실해 이리저리 물 흐르는 대로 살려는 사람.

 

 사실은 마음만 급하다. 차라리 몸이 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괜스리 뒤쳐진 것 같아서 왠지 패배감을 느끼지만, 란도샘은 우리들에게 우리 인생의 신인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주연상을 노리라고 말하고 있다. 4월에 피는 꽃이 있듯, 9월, 10월에 피는 꽃도 있다고 하니. 위안이 되긴 한다.

 

 하지만 늦게 피는 꽃이 되기 위해서 지금 마냥 한가하게 있을 수는 없다. 이 책이 위로에서만  그쳤다면, 여운이 오래 남지는 않았을텐데. 격려하며 열심히 도전하라며, 호흡을 길게 가져가려며 독려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좋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28쪽 열망은 힘이 세다.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열정과 보람을 기준으로 삶을 살 스 있게 하기 때문니다. 그렇게 좁고 험난한 길을 사서 가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우뚝 서 엤다. 매 순간 가장 합리적으로 최적화 된 의사결정이 모인다고 해서, 궁극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열망의 힘 때문이다.

 

106쪽 인간관계는 쇼핑과 다르다. 인간관계란 좋은 파트너를 '선택' 하는 일이 아니라, 좋은 파트너가 '되는' 일이다.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고, 연인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밑지지 않는' 선택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관계란 호혜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도 밑지지 않겠다고 나오는 순간, 서로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이 불가능해져 버린다.

 

156~157쪽 수많은 작심삼일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는 그 결의가 실은 오늘의 나태를 합리화하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연습은 많은 '오늘'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내일은 없다. 그러므로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 조금이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297쪽 사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첫 직장이 아니라 마지막 직장이다. 첫 한 방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하지 말라. 마지막에 누가 웃을지 보자며, 호흡을 길게 가져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취업을 그대의 '거대 생애 계획(grand career plan)'의 틀 속에서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초반의 희생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능성만 있다면 말이다.
 세상은 급변한다. 그리고 인생은 길다. 그 '감수'의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출발을 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남은 수많은 인생의 걸음들을 어떻게 걸어 나갈 것인거에 있다.

 

 이 정도 까지만. 아직도 베스트 셀러인데,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프니까청춘이다인생앞에홀로선젊은그대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김난도 (쌤앤파커스, 2010년)
상세보기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1. 3. 24. 19:0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뭔가 우리 인간의 존재를 다룬 철학적인 책인 듯, 제목은 말하고 있지만, 사실 철학책은 아니다.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소설책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에 대해서 한꺼풀 더 벗겨지는 그런 느낌이다. 예전 그의 소설 농담을 읽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인간의 뭔가 밝히기 꺼려 하는 약한 그런 속마음을 그는 거부감이 덜 들도록 글을 쓰는 듯한, 개인적인 느낌이다.
 
 존재의 무게
 
 존재에도 무게가 있을까? 사실 무게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무겁다, 가볍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게를 재는 우리의 관념에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 할 수는 없지만, 가볍고 무거운 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다 동의할 것이라는 가정을 먼저 해야 했을 것 같다.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우리의 존재. 이러한 제목의 책도 있더라지. 두꺼운 삶과 얇은 삶. 이 책에서는 일단 주인공인 테레사와 토마스를 통해 가볍고 무거운 삶을 조명한다.

 

 이 두 사람은 우연에 대해서도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다. 우연을 불쾌히 여기는 남자, 우연의 주술성을 믿는 여자. 여러 우연은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했고, 그 우연은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했던 <그래야만 한다!>는 필연으로 가장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만난 그 둘은 사랑을 하게 되고, 정말 가볍고 약한 테레사는 토마스라는 전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토마스에게는 두 여인이 있다. 토마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토마스가 필요한 사람. 이 두 사람은 또한 삶에 대해 가볍고 무거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표상이다. 당연히 토마스의 사랑에는 가볍고, 무거운 사랑의 이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랑의 무게뿐만 아니라, 처음엔 약하고 가벼웠던 테레사 또한 점점 토마스만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그의 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의 포인트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또한 가볍고 무거운 것은 사람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체코의 정치적인 상황을 비추어 볼 때, 밀란 쿤데라는 분명 체코의 참을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가벼움도, 이 책에 녹이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인 토마스는 정치적인 선택에서도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약자로, 신념에 대해서 비굴함을 강요받기도 한다.
 
257쪽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는 가볍고도, 무겁운 존재가 혼재해 있다는 것이 결론인 것 같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이 존재가 가벼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를 의지 하지 않고서는,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약하디 약한 우리의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

 

 이 책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결말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인 테레사와 토마스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뒤엉킨 시간으로. 음 그러니깐 이러한 구성을 액자 구성이라고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 같다. 읽는 독자는 이미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어 알지만, 이야기 속의 이야기의 결말은 그들의 존재에서 끝나기 때문에, 먹먹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서,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한번 더 읽고 싶은 책이다. 아오. 나도 리뷰 잘 쓰고 싶은데.

 

 여담인데, 예전에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의 야나체크 편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을 살짝 보여 준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야나체크의 음악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사용된 야나체크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 때, 진행자가,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참을 수 없는 흥분의 무거움이라고 이야기 한다고도 했다. 또한, (교양있는) 우리는 야한 영화를 볼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11쪽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15쪽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초벌그림>이란 용어도 정확지 않은 것이, 초벌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36쪽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59쪽 그런데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의해 좌우될수록 보다 중요하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나 않을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다는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169쪽 영혼을 흥분시키는 것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행동하는 육체에 의해 배신당하는 것, 그리고 이 배신을 목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40쪽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3. 18. 12:07

#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

 

 어디를 가도 이 책이 보인다. 깜짝 깜짝 놀란다. 약간 푸르스름한 책을 들고 있으면, 100% 이 책이다. 도대체 아픈 청춘들이 왜 이렇게 많은거야. 분명 위로 받고 싶은 거다. 아파도 괜찮다는. 나만 아픈게 아니라는. 그래도 아픈 거 티내기는 싫어, 나는 가방에 슬그머니 집어 넣는다.

 

 쉬운 게 없다. 한 치 앞을 몰라, 발을 어디로 내 딛어야 할지. 과연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고, 또 정말로 내가 가야할 길인지. 기도해도, 모르겠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줄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이 희미해져버리지는 않을지. 또한 나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그저 "자기확신"에 그치는 것은 아닐지 하는 일말의 불안도 있다.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을 티내는 거구나.

 

 몇 년 전에는 우석훈 교수님의 88만원 세대라는 청춘을 위한 책이 인기를 끌었다. 이 책도 비슷한 위로를 주긴 한다. '너만 88만월을 받는게 아니야.' '그런데, 우리 이 사회를 바꿔보는 건 어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위로를 주는 반면에, 88만원 세대는 투쟁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이 다르다. 역시 뭔가 나서서 해야하는 투쟁보다는, 가만히 있어도 전해지는 위로가 청춘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더 필요했던 건 아닌가 싶다.

 

 항상 면접을 앞두고는 이게 정말로 내가 가야하는 길인지 잘몰라 확신이 서질 않는다. 정작 자기소개서 쓸 때는 꼭 서류 통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서류를 통과하면, 우왕좌왕. 아마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은연 중에 이것에 묻어나와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는지도 모른다. 뭐, 물론 다양한 이유들이 많겠지만. 그런데. 진짜로. 떨어뜨렸으면 이유 좀 알려주라고 진짜 ㅡㅡ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1. 3. 7. 22:15

 실의에 빠져있을 때 읽기 시작 했던 책.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꼭 나는 소유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창 했었을 때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계기는 신문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일전에도 쓴적이 있지만, 일단 소유냐, 존재냐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싫지만, 대게, 소유와 존재는 나눠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실례들을 책의 앞부분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만 재밌었고, 나머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대충 읽은 것 같다.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라는 내용에서는 우리들이 평소에 쉽게 하고 있는 소유지향적인 생각들을 짚고 넘어간다. 헉. 평소에 나는 소유 지향적인 인간의 전형인 것 같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보며.

 

 언어의 변화는 생각을 한다(존재) 와 생각을 갖고 있다(소유)의 차이, 사람을 생각 할 때도, 어떤 차를 타는 사람, 어디에 사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심지어는 지식 및 독서도 소유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리뷰를 써서 기억의 마모를 둔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소유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존재 자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게 대부분이다. 또한 최근에 구직을 하는 학생의 입장으로는 나도 나의 존재로 평가 받는 게 아니라, 토익, 학점, 기타 스펙으로 평가 받는 세태이다. 이는 다 사람 또한 소유의 대상으로 이용 가치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요즘 드는 간절한 생각은, 스펙이 ...인 나가 아니라, 왠지 상쾌한 나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든다. 이는 내가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 사는 누구가 아니라, 왠지 포근하고, 따뜻한 사람들로 기억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음 그런데 괴팍한 사람도 존재로 기억하는 건가?ㅋㅋ

 

 이렇게 끝나는 책은 아니고, 책의 후반부에는 지리한 대안을 제시한다. 너무 어렵고 문자 그대로 지루해서.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멀뚱멀뚱 글씨 구경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어쨌든 이 책을 읽고나서, 약간의 사고의 지평은 넓어지지 않았나 싶다. 내 평생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소유냐, 존재냐 를 생각해보지 못했을꺼야,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것이 이 책을 읽는 유익이 아니었나, 혼자 합리화 해본다.

 

 

25쪽 우리의 자기 보존 기능을 마비시키는 또 다른 근거는개개인이 당장 눈앞에서 감당해야 할 희생보다는 차라리 아득해 보이는 막연한 재난 쪽을 택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64쪽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77~78쪽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힘을 쓰기 위해서 사는 것 - 오로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사랑하는 것이다.

 

95쪽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소유하는 여러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전반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용품, 재산, 의식(儀式), 선행, 지식, 그리고 사상 등등. 이 모든 사상(事象)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 실현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152쪽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175쪽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냐존재냐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 심리학자 > 심리학자일반
지은이 에리히 프롬 (까치, 2007년)
상세보기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3. 4. 23:23

# 시계, 거울, 창문.

 

이 3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카지노에 없다는 것. 사실 카지노에 가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다. 왜 이 3가지가 없을까? 카지노의 상술이긴 하지만, 뭔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긴다. 시계, 거울, 창문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내가 앉아있는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 가는 구나. 적어도 내가 멈춰 있는 순간만이라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다면 좋으련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죽어간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분명 죽는 때는 다가오고, 시간이라는 놈은 우리의 죽음까지 남는 시간을 점점 앞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한다.

 

# 요즘 자꾸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

 

예레미야 23: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을 처음 인지하게 된 때는 지난 10월이었던 것 같다. 면접 탈락 발표가 나고나서, 충격이 컸었다. 딱히 붙을 이유는 없었지만, 떨어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던 면접이었기 때문이다. 눈물이 울컥하려던 것을 참았다. 오히려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한다. "괜찮지? 아, 괜찮아요. 잘 될꺼야." 이 한 마디가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는 사실도 그 시절에 알았다.

 

발표가 나서, 한 시간 넘게 이불 둘러싸매고 누워있었다. 그러다 일기로 마음을 풀고.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목요찬양예배에 갔다. 예배 중에, 목사님께서 예레미아 23:23~24 말씀을 인용하셨다. 우리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가까이에 있는 하나님만을 생각한다. 한 때, 하나님을 생각할 때, 찬양 가사에서 처럼.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음을 해도, 구직은 요원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 데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원하는 것 같았다. 천지에 충만한 하나님은 왜 모를까. 이런 찬양이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철야 예배 때 불러서 생각나는 찬양인데, 그 찬양 가사 중에는

 

가시 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라는 게 있다. 어떻게, 가시 밭의 백합화에서 예수 향기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걸 아는 게, 천지에 충만한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어쨌든 요즘 자꾸 이 말씀이 생각나는 것은, 기도 응답하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온 땅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을 눈여겨보고, 귀 기울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 대학교에 갓 입학한 꼬꼬마 신입생들을 바라보며, 같이 캠퍼스를 거닐던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저 때가 좋았는데." 그래서 그랬다. 나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비록 아직 직장도 없고, 내세울만한 거 하나도 없지만, 나는 그 때 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변덕이 심해서, 내일 아침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예전에 이찬수 목사님 설교 중에서 누군가의 말을 인용했었는데, 청년에게 가장 주기 아까운 게 청춘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직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가치를 잘 모르지만, 무얼 해도 싱그러운 지금 이 청춘, 대학교 신입생 때 더 잘 알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새로운 팀은 짱이다. 간사님을 비롯해서, 새로운 리더진. 자주 만나서 그런지, 벌써부터 아늑해졌다. 좋다!

 

# 이번 주일 아침. 참 오랜만에 맞는 비였던 것 같다. 늦은 겨울비 인지. 아니면 봄을 맞이하는 비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꽃샘비라고 해두자. 어쨌든 오랜만에 어색하게 우산을 갖고 나갔다. 전 날 잠이 안와 뒤척이다가 늦게 잤고, 아침에 겨우 일어났다.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해 조금 더 따뜻하게 입고 올껄 그랬나 보다 했더랬다.

 

종로 3가역에서 내려, 대동세무고등학교를 찾는 데 한참. 참 좋아진 세상. 구글맵을 이용해서, 겨우 찾아갔다. 도착 해서, 교실에 들어가니, 이미 열심히 가져온 종이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뭐... 준비해 간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연필도 준비 안해 갔으니. 왜 생각지도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식은땀 줄줄. 원래 공식적인 시험에서는 연필 사용 불가 인 줄 당연히 알지만, 괜히 연필이 없어서 불안했더랬다.

 

시험 시작. 뭔가 나도 언론사 시험을 보는구나. 나의 시험 이력에 한 획(?)을 긋는 기분으로 시험을 본 것 같다. 허나, 상식 시험에서 좌절. 원래 상식만은 진짜로 자신있었는데. 이래뵈도, 상식 있는 남자. 아오. 며칠 전에 신문에서 본거였는데, 한 숨만 수 차례. 그리고 서너어 문제.

 

작문 시험. 언론사 시험이 이런건지도 몰랐었다. 주제어 하나만 하니 던져 놓고, 한시간 동안 1600자 내외로 쓰라는데. 막막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나는 잘 한 것 같다. 다만, 분명히 보수적인 성향인 경제 신문에 정부 비판을 많이 해놨으니.

 

제작년에 읽은 로맹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소설을 처음에 인용했다. 그 소설은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책인데, 그 책에 "벽"이라는 내용의 단편 소설이 등장한다. 약간 외설적이긴 한데.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가끔 마주쳤던 천사같이 아름다운 한 여자를 연모하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와 여자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사이이다. 남자는 고독했던 존재였다. 그의 전 존재는 애정을 갈구했다. 그러던 중, 그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그를 감동시켰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그의 옆 방에서 들리는 삐걱임, 신음, 그리고 특이한 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고, 이는 그를 더욱 낙담하게 만들었다. 미지의 처녀를 사랑하던 그는 그녀가 쾌락의 소리를 내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고독의 겨운 세상을 져버리고,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후에 밝혀진 사실은 그것은 그 청년의 오해했던 소리는 그녀는 비소 중독으로 인해 점점 죽어가는 소리였던 것이었다. 그녀가 죽은 이유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예를 들고 - 사실 소설의 내용을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했다. - 벽은 소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용기 없음으로 자신을 죽인 것, 그리고 비약적이지만은 고독에 빠진 그녀를 구하지 못한 점도 남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MB 취임 3주년이 되던 주였던 것 같다. 그래서 3년 동안 잘했던 점. 물론 이것도 억지 칭찬이었지만, 대충 썼다. 그리고 질책도 했다. 소통의 부재에 대한. 광우병 소고기 문제 때, 그는 분명 자신이 소통하지 못함에 대해서 반성했었고, 앞으로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취임 3주년 기자 간담회는, 가지 회견이 아니라, 등반으로 바꼈고, 등반하는 동안 받았던 질문은 겨우 3개, 그것도 영양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벽을 뚫고 소통해야 한다. 앞에서 예를 든, 남자와 여자의 꼴 나기전에.

 

이렇게 써놓고 보니, 작문은 잘한 줄 알았는데, 맘에 안든다. 뭐, 그래도, 이게 그 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긴 했다. 벽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생각났던 게, 그 소설이었으므로.

 

시험을 마치고, 나가는 길. 눈이 안 좋아, 혹시 으로 본건 아니었나. 급 생각이 들어서, 거듭 확인했더랬다. 어이 없겠지만, 진짜로, 식은 땀 줄줄.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2. 18. 14:01

가슴에 서슬 퍼런 멍이 슬프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가슴 답답함.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당분간은 이 구멍을 메꾸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내재된 열등감이
한 순간 밖으로 뛰쳐 나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어찌보면, 이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마음의 짐.
하지만 꼭 치유 받아야 하는 마음의 상처.
가슴에 서슬 퍼런 멍이 아리고 또 시리다.


궁상 맞게 싸이에는 쓸 수 없는 글.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1. 28. 01:04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2005년에 친구와 학교에서 봤던 영화. 차암 재미있게 봤던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아키가 가고 싶어 했던 세상의 중심은 호주의 울룰루라는 곳이란다.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 그래서 검색해서 찾아봤다.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의 중심에 관한 것이다.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지는 울룰루라는 곳으로 가서 사랑을 외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사랑을 외치기 위해 내가 서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씀.

 

 사실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자꾸 자꾸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이 동요가 생각나긴 하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하지만 인정해야 할 다른 한가지가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면,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곳도 세상의 중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다른 사람도 생각하라는 것이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빚진자 의식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관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 사실 지난 여름 특새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우리는 빚진자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 즉 권리를 주장하는 채권자보다는 빚진자인 채무자의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 채무자는 어떻게 하면 빚을 갚을까 하는 낮아진 마음을 갖는다.

 

 많이 알고 있 듯,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9시, 12시, 3시, 5시에 온 사람에게 똑같이 품 삯을 주는 것에 대해서 혹시 분개 하지는 않았는지. 그 이유는 내가 9시 포도원의 품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5시 포도원 품꾼이라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황송할 것이다. 우리는 9시 포도원 품꾼처럼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5시 포도원 품꾼의 마음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권면도 설교 내용 중의 하나였다.

 

 우린 때론 관계에서 채권자 의식을 갖음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고, 그로 인한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 실망이라는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해준 것 보다, 내가 상대로부터 받은 것이 작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일 게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이 상대에게 불순한 의도 - 즉 내가 이 정도를 해주고,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는 - 로 무언가를 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상대에게 행함 자체에 기쁨이 있었다면, 절대로 내가 해준 만큼 못받아도 실망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서 항상 우리는 기대와 실망을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럴 때가 많이 있다. 어떤 때는 일체의 기대감과 혹시라도 모를 실망감을 피하기 위해 많은 관계를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삶, 정말로 피폐해질 것이다. 결론은 상대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든 대가를 바라지 말고, 진심으로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오늘 아침부터 했던 생각.

 

# 성경책을 잃어버린 유익

 

신앙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성경책을 샀다. 선교 며칠 전에 잃어버려서, 완전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정신을 어디에 놓기에 성경책을 잃어버릴까. 어쨌든 그동안 임시방편으로 홀리 바이블 어플만 보다가, 마침 오늘 교보에 갈 일이 있어서 성경책을 샀다. 굿모닝 성경인데 예쁘다. 뭐 성경책이 예쁠 필요가 있겠느냐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성경책을 사러 같이 갔더랬다. 적당히 큰 성경책과 미니 성경책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그래, 미니 성경책은 이동 중에 보는 것은 좋긴 하지만, 평소에 읽기에 불편 하니까, 조금 더 큰 성경책을 사야겠다. 그래, 이걸루 낙찰!" 했는데, 친구가 미니 성경책을 선물해줬다. 성경책 열심히 읽으라며, 선물이라며. 역시 신학생 친구라서 그런지. 정말로 감사했다.

 

 그리고 최근 성경책이 없던 내게 성경책을 사줄 챈스를 잡았지만, 그 (생색) 챈스를 잃어서 아쉬워했던 분ㅋㅋ께도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 또 감사했다.

 

 성경책을 잃어버린 유익은 감사를 느끼게 하는 것이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리고는 정말 심하게 자책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잃어버린 것도 감사하다.

 

 또 한가지 생각한 것은, 내가 성경책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교회? 동대문? 진수네 집? 지하철? 부동산 집? 잃어버린 날 동선이 대략 이 정도 인데. 어디에서 잃어버렸던지, 그 성경책이 꼭 필요한 사람이 주워서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성경책이 성경책이 필요한 사람의 기도 응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늘 들었기 때문이다.

 

# 오늘 한 커플과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 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은 없었지만, 학교에서도, 요즘 교회에서도 항상 커플들 사이에 낑겨 있어서, 너무 익숙해져 있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같이 마커스 집회에 갔다는데, 정말 좋았다.

 

 성경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었는데

 

출애굽기 14장 8절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바로는 처음부터 완악했던 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완악하게 만들었던건데.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분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완악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의 열재앙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단어이다.

 

왜 도.대.체.

 

 본인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말로 의지할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과 자신의 완전함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즉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는 홍해, 뒤에는 완악한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를 위하여 싸운다고 하셨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또 다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갈라진 홍해에 따라오게 만들었고, 그 홍해에 애굽의 군사들은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된다. "이 또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시다." 라는 것을 집회 때의 느낌을 완전히 살려서 쓸 수는 없지만. 집회 때 깨달았다. 하나님은 나쁜 분도, 실수하시는 분도 아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내 믿음이 아니라.

 

# 아 졸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쓰다 보니까 또. 지난 며칠 동안 생각했던 아이템을 한꺼번에 오늘 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오늘 아니면, 다시는 이 느낌으로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실 아까 생각했을 때 바로 썼어야 했는데.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1. 1. 23. 23:35

# 오늘 하루, 또 임의 침묵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다. 비록 지지리 궁상이지만, 뭔가 아쉬움이 깊다. 우리의 만남들, 하나님께서 깨알같이 계획하셨었고, 이 모든 만남들의 헤어짐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을 것이지만, 만남도, 사랑도, 이별도 사람의 일이라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진다. 분명,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기는 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었다. 정말로.

 

작년 한해 동안, 가장 힘이 된 사람들. 힘들 때 가장 많이 의지 했던 사람. 가장 격려 해준 사람들, 너는 이상하게 잘 될 것 같다는 사람. 기도해 준다는, 기도해줬던 사람들. 가장 자주 만났던 사람들. 가장 연락을 자주 했던 사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줬던 사람들. 또한 기쁨을 선물 해주고 싶었던 사람. 정말로 기쁨이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사실 내가 더 기뻐서 한 거였다.

 

어쨌든 다시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이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어야지.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기때문에.

 

음. 근데 지지리 궁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시간이 지나. 후나, 너 그 때 그랬었어, 그러면, 나는, 네? 제가 언제요?, 이러면서, 제일 먼저 적응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임의 침묵
                          한용운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나이 듦에 대한 수학적 고찰

 

 사실 해가 바뀌면서 부터 쓰려고 했던 글인데, 누가(?ㅋㅋ) 이미 나이에 대한 고찰을 써버려서, 왠지 이 글을 쓰는 나는 따라쟁이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명백한 표절이군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핍박을 무릅쓰고라서도 써봐야겠다. 왜냐면, 이것은 분명, 작년 부터 생각했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이제 27이다. 빠른 86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26이긴 하다. 그래도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친구들이 27이기 때문에, 나도 비자발적으로 27이라고 해두겠다.

 

어느 때인가 부터, 나이 듦에 대해서 둔감해졌다. 어린 시절에는 해가 바뀌면 뭔가 아쉽고, MBC 가요 대상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쓸어 안았더랬다. 하지만, 이제 해가 바뀌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거나, 뭐 해가 바뀐다고 삶이 갑자기 크게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 12월 31일이나, 2011년 1월 1일은 하루 차이일 뿐인데, 왠 호들갑일까 하는 생각들.


왜 어릴 때는 해가 바뀌면, 아쉽고, 또 아쉽고, 뭔가 새로운 계획도 짜보고 했었지만, 왜 나이가 들 수록 나는 둔감해지는 가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왜 일까? 이를 수학적으로 풀어봤다. 음 수학이라기 보다는 산수라고 해둬야겠다.

 

먼저, 증가율로 풀이해봤다. 예를들어, 1살에서 1살을 더 먹으면 2살인데 이때의 증가율은 (1/1)*100 = 100% 이다. 어린 시절에는 해가 지나는 만큼 키도 크고, 생각도 쑥쑥 커버린다. 2살에서 3살로 증가할 때는 (1/2)*100 = 50% 이렇게. 음 작년 나의 나이가 26이었으니까, 올해 내 나이의 증가율을 계산해 본다면, (1/26) * 100% = 3.84% 증가했다. 어쨌든 나이 함수는 증가는 하지만, 증가의 폭은 감소하는 함수이다. 이것을 보고 체감한다고 경제학에서는 표현한다. 맞나?ㅋㅋㅋ 이미 수 차례 언급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같이, 증가는 하지만, 증가하는 폭이 점점 줄어 드는 그런 함수 말이다.

 

어쨌든 수학적으로 풀이해보면, 이렇다는 것이다. 점점 나이 듦이 익숙해져가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면, 지금이 좋기 때문에, 지금의 안정성을 깨뜨리기가 싫기 때문에.

 

예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서, 지식의 증가가 어린시절에는 스폰지를 흡수하듯이 쑤욱 증가했지만, 요즘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는, 그래서 어린 시절에 공부하는 것이 저엉말 중요한 것 같다는. 경제학을 둘 다 공부했기 때문에, 일단 지식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지만, 비록 증가의 폭은 적지만, 분명 증가는 하고 있다. 즉 평균적으로 지식은 분명 증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라는.

 

새해의 첫 다이어리가 개소리 한 움큼이군.

 

# 올해의 나는 어떨까. 정말 앞을 내다 볼 수 없다. 괜히 뒤쳐진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올해 갑작스런 도약이 있을지, 혹은 3.84% 정도만의 성장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쓰러기조 넘어저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강한 팔로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매 순간 소망 잃지 않고, 살아가야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12. 27. 00:28

# 어제 너무 피곤해서 12시 전에 자리에 누웠다. 정말 단잠을 잤다. 푹 8시까지 잤다. 그 때 일어나서 바로 빨래를 했어야 했는데, 침대에서 한참을 빨래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8시 15분에 빨래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빨래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나가야 하는 시간을 계산 못하고 무턱대고 돌렸다. 다행히 세탁은 다 되었고, 헹굴 때 알게 되어서, 급탈수 후. 지금 다시 헹구고, 탈수 대기중! 기숙사에 살다보니깐, 이런 일들도 생기네.

 

# 오늘 GBS 주제는 허영이었다. 또 허영빼면 시체인 나. 이렇게 글쓰는 것도 어쩌면 허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영에 대해서 많이 나눴다. 하나님의 인정과 사람의 인정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리고 사람의 인정에 더 갈급했던 나의 모습. 사람의 인정은 거기에 그치고, 하나님의 인정에 대한 상급은 하늘 나라에 쌓일텐데, 나는 땅에 쌓일 것만 바라보며 사는 그런 사람. 물론 하나님 인정, 사람의 인정 모두 다 받으면 좋긴 하지만. 음. 그런데 인정을 받는 다는 것. 인정을 받게 되면 교만해지는게 하나의 코스이다. 그 코스를 잘 벗어 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팀 모임때, 감사의 제목들을 나눴었다. 내가 올 해 감사할 것들이 뭐였나. 사실, 실패로 점철된 올 해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감사할 것들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올해의 타이밍은 차암 절묘하다. 6월을 기점으로 올 해 내 삶이 조금은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6월 부터 리더를 시작한 거? 맞다. 그거다. 그런데, 6월 전까지는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목표로 한 것들, 물론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나의 노력 이상으로 열매를 맺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능.력.과 의.지.로 말이다. 물론 그 중에 실패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소소한 실패들은 나에게 겸손이라는 것들을 알려주기에 너무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예배 때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고난이 없었던 사람 있었는지, 손 한번 들어 보라."는 질문에, 나는 장난스레 손을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차암 교만했던 나의 모습이었다. 장난으로 손을 들긴 했지만, 하나님은 교만했던 나의 모습을 보셨다.

 

그리고 6월 이후 이상하게 리더를 하면서부터였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해석이지만, 그 이후에, 뭐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 진게 없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아까 썼던 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의 노력으로 이뤄왔던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가 날기 시작하니깐, 정말로 배가 떨어졌다. 취업에서부터, 말 할 수 없는 이것 저것. 내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 진게 없는 것 같다.

 

새삼, 나의 능력 없음을 그리고 예전의 나의 교만을 떠올리며, "나는 정말. 정말. 되는일이 없구나.(미약하구나)"라는 말 밖에 안나오는 것 같다. 물론 그 모든 시간이 겸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 같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마음 속에 주인 삼은 것들을 내려 놓으라는 뜻 같기도 하다. 지금은 내가 해석을 더 잘 못하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정말, 내년에는 정신차렸으면 좋겠다. 올 해 너무 힘들었거든요ㅠ.ㅠ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읽다가,

 

36쪽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믿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좌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하려면 아예 교만하십시오! 교만하는 것은 좌절하는 것보다 신앙이 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하는 것은 진실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과 절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는 결코 절망이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그것은 구원 자체가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무엇을 했다거나, 내가 협의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구원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의 제목을 찾자면, 그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찬양과 예배를 통해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신 것. 그리고 정말로 사랑하는 11진 2팀의 지체들을 통해서도. 이게 감사의 제목이다.

 

물론 취업 안된거, 그거 하나로 무슨 좌절이냐, 호들갑떨지 마라,고 얘기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내 인생에서 이와 같은 실패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팀모임때 얘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인데, "아, 리더 하면서부터 되는 일이 없었네요. 그래도 내년에 주실 것들 생각하며, 미리 감사하네요." 하고 끝마쳐서.

 

#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이란 무엇일까.

 

사실 예전에는, "순수한 그런 믿음인가? 그럼 순수한 건 뭐지? 에잇. 나는 하나도 순수하지 않는데ㅠ.ㅠ"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그런데 수요 예배 때, 목사님께서 두 가지 얘기를 해주셨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아빠, 요즘 힘드시죠? 제가 오늘 학교 마치고, 돈 촘 벌어 올게요. 그러니 용돈 주실 걱정은 안하셔도 되요."

 

이런 아이와

 

"아빠, 과자 사먹게, 용돈 좀 주세요. 나한테 용돈 줄 사람은 아빠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달라고 하면 주실꺼잖아요. 아빠만 믿어요."

 

두 아이 중에, 후자의 아이가 정상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후자의 믿음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 이렇게 글 쓰는거. 오늘 GBS때 했던 허영이 아니길. 허영과 허세로 가득한 나의 모습. 이 글 속에도 나의 허영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 빨래 다 헹구고 탈수도 완료! 이제 빨래 널고 빨리 자야지. 내 특유의 전형적인 용두사미의 글. 하지만 이번에는 사두사미! 빨래로 시작해서, 빨래로 마쳤다. 이건 수미상관. 수미상관이란 "시가에서 첫 연을 끝 연에 다시 반복하는 문학적 구성법" 아. 나의 문학적 재질이여. 문학 소년!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0. 12. 20. 01:11

#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해야할 일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침묵도 우리가 해야할 일들 중의 하나이다. 침묵해야 비로소 들을 수 있다.

 

반면 시끄러운 곳에 가면, 사고하기를 멈추기도 한다.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클럽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일탈을 원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냥 시끄러운 그 상태에 머물기만 하면, 생각을 피할 수 있다. 시끄러운 곳에서 온전한 생각을 하기는 여간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이 시대. 침묵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 미디어, 핸드폰 등. 조용히 생각하게 하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 때로는 세상이 우리를 미혹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끊임 없이 시끄럽게 하는 것.

 

조용히 있으면 불안해 지는 시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침묵 속 에서야 참 나를 만날 수 있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나를 말이다.

 

# 고요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눈이 내리던 금요일 새벽,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 한편이 생각 났다. 왜 그날 이 시가 생각났는지는 모르지만.

 

임의 침묵
                          한용운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도대체 만해 한용운은 어떻게 이런 시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천재다 천재. 읽을 수록. 이 시의 임은 조국, 부처님, 혹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일 수도 있다. 이런 비유와 상징이 정말 좋다. 그냥 써놓고, 임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둘러 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도 이걸 노리지 않았나 싶다.

지금 나의 임은 누구 일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그건 저도 대답 못해요. 왜냐면 저도 모르니까요. 알아도 대답 못해요. 중요한 것은 임은 갔지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대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산책하시길. 아. 정말 써놓고도 오그라든다. 왜냐면 지금은 감성이 충만한 새벽 1시. 내일 진짜 이건 부끄러워서 다시 지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시절. 이 시를 입시용으로 배우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 시절에 배웠던 이런 소소한 것들이 나이 들어서 생각나고, 이러한 것은 나름대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학교에서 쓸데 없는 것들을 배우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 쓰고 보니, 제일 위에 있는 침묵은 나의 침묵이지만, 위 시의 침묵은 당신의 침묵이다. 나의 침묵은 정당한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사랑하는 나의 임이 침묵한다면, 답답해 죽겠지? 하지만 임의 침묵도 신뢰해야겠다.

 

# 문득 오늘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왜 떠오른거지.

 

# A안과 안이 있다. (A와 ㄱ으로 쓴 것은 둘 중에 한 가지가 우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다 동등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한 가지가 절대로 열등한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A와 ㄱ으로 써봤다.) 둘 다 잘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둘 다 좋은 기회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왠지 A를 선택하면 ㄱ을 회피하는 느낌이고, ㄱ을 선택하면, A를 회피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선택해도 마음이 편지 않을 것 같은 마음. 결론은 나는 김칫국을 너무 잘 마신다는 거다.


# 이 글의 결론은. 결국 내가 지금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성 충만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보고서와 빨래 때문이라는 것. 물론 후자가 더 큰 이유다. 빨래 후. 이제 널고 자야겠다.


Posted by 데이드리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