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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20 축구를 하다가
  2. 2013.05.05 독서론
  3. 2012.12.17 즐거운 편지 - 황동규
  4. 2012.12.16 깊이에의 강요
  5. 2012.11.11 용의자 X의 헌신
  6. 2012.11.05 카톡 삭제 3
  7. 2012.11.05 10월이 간다
  8. 2012.10.27 오렌지색 예찬
  9. 2012.10.22 조르주 상드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10. 2012.08.21 생각을 생각하기
단상2013. 5. 20. 00:49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 들이 있다. (사실은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예를 들어, 예전부터 시력이 나빠서 사물이 잘 안 보인다는 느낌이 어떤 걸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시력이 나빠지고, 멀리 있는 사물이 잘 안 보이며, 멀리서 내게 인사하는 사람을 못 알아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 시력이 나빠졌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쓸데없는 궁금증이 풀리긴 했으나, 이런 궁금증은 차라리 풀리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뻔했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계기는 엉뚱하지만, 오늘 아침에 축구를 하면서였다. 조기 축구의 특성상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함께 축구를 했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뛰는 모습과 공을 차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서도 축구를 하는 기분은 과연 어떤 걸까 궁금했었다. 젊을 때처럼 잘 뛰지도 못하고, 컨트롤도 잘 안되는데도,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아침을 깨워 공을 차기 위해 운동장으로 그들을 이끈 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나도 나이가 들어 그들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내 맘대로 컨트롤이 안되는 몸을 이끌고 공을 차며, 지금은 나름대로 쉬지 않고, 공을 쫓는 체력도 나이가 들어서도 남아 있을 것인가도. 이는 도저히 나이를 먹기 전에는 풀릴 수 없는 류의 궁금증이다.

나이가 들어, 지금의 그 궁금증이 풀릴 즈음이면, 나의 청춘도 다 지났을테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며, 나의 그 시절을 회상할 생각을 하니, 지금 이 청춘을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 같았다. 흘러가는, 그리고 흘러갔던 시간이 너무 아쉽다.

나이를 들어서는 어떤 재미로, 또 어떤 재미를 기대하며 살아갈까? 어릴 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재미 - 어릴 때는 아빠가 신문이나 TV 뉴스를 재미있게(?) 보는 것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TV를 켜면 뉴스보다 만화 영화가 훨씬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 를 느끼는 지금 이 나이에 이르니, 왠지 슬퍼 졌다. 뭐, 나름의 소소한 재미 - 말초적인 것이 아닌 - 를 추구하며, 살아갈 테지만 말이다. 때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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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3. 5. 5. 00:31

# 시기나, 계절에 따라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먼저, 신록의 계절인 5월에는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을유문화사, 2005), 4월은 - 이미 지났지만 -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문학사상, 2009)를 들 수 있다. 올해 4월에 꼭 읽으려고 했지만, 놓쳐서 이제 내년 4월까지 기다려야 할 듯.


어쨌든 계절에 따라 생각나는 책 또는 시 - 가끔 내 페북에 올렸던 - 와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도 하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물론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말이다.


#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 2010)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의 선배인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이상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라는 말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책이길래. 라는 생각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지만, 사실 별내용은 없었던 게 기억난다.


어쨌든 상실의 시대를 읽은 많은 사람은 으레 위대한 개츠비도 읽는 게 수순인 것 같다. 나는 아직 각 2권의 책을 두 번밖에 못 읽어서, 나가사와 선배와는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5월 16일에 개봉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본다면, 3번은 채우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한 편 보는 것을 책 한 권 읽는 것으로 퉁쳐주는 아량을 베풀어 준다면 말이다.


아참, 그리고 나가사와 선배의 독특한 독서 철학. 그는 죽은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는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 최근 독서는 한 달에 한 권 정도 겨우 하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요새는 책을 못 읽고, 아니 안 읽고 있다. 요새는 웹툰 <미생>에 빠져 있는데, 미생에서 삶을 배운다. 아이폰으로 보면서 중간중간 캡쳐해 놓는 컷도 많다. 다음 주 월요일에 캡쳐해놓은 사진들, 인쇄해서 책생 맡에 붙여놓을 생각이다.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12. 17. 23:07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친한 형의 블로그에 갔다가 다시 읽게 된 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을 담는 직업이 시인이 아닐까 싶다. 문학의 길을 걷는 사람을 일컫는 많은 단어 - 가령, 작가, 소설가 등 - 중에서 왜 하필 시인에게만, 인(人)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아마도, 시라는 장르가 인간의 감정선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의 시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이다. 일명 국민 연애시. 학창시절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 하며 지은 시란다. 전혀 즐거운 편지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기다림조차 즐거움이었기에, 혹은 편지를 쓰며 생각이 난 그 연상의 여인이 생각나 웃음 짓지는 않았을까. 그리하여 그 편지는 즐거운 편지가 되었고.

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2. 12. 16. 00:38

한 촉망 받던 미모의 여류 화가의 장래를 꺾는 것은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당신의 그림에는 깊이가 없어." 이는 한 평론가의 평이다. 깊이가 없다는 평을 접하자마자 그 여류 화가는 깊이 없음을 자책하며, 결국 파멸의 길로 접어들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그 여류 화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평론가는 그녀의 그림에 대해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칭송했다.


이는 실화는 아니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소설집 「깊이에의 강요」(열린책들, 2000)에 실린 단편 <깊이에의 강요>의 내용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깊이"라는 상대적인 단어를 비꼬고 싶어서 이 단편을 썼을 것이다. 아마 자신의 글에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평에 대한 항변을 깊이에의 강요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나 그리고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깊이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대화를 나누며, 그 사람의 깊이에 대해서 가늠해 보지만, 결국 결론은 "어느 누군가의 깊이는 쉬이 판단할 수 없다." 라는 점이다.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사람도 나름의 깊이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또한 자못 심각한 척, 진지한 척하는 나는 깃털처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깊이가 없는 사람의 전형이기도 하다.


관계에 있어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깊이에 다다를 때,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깊이 없는 가벼운 만남은 너무나도 싫다.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평생의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만남이라면 깊이가 있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류의 깊이에의 강요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깊이에의 강요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8-03-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깊이가 없다`라는 평론가의 말에 `깊이`가 무엇인지 구현하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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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11. 11. 22:39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원작을 먼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용의자 X의 헌신>(2006, 현대문학)을 읽었다. 한 넉넉잡고 집중해서 3시간이면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가방에 2주간은 넣고 다녔다가, 어제 드디어 완독! 책장을 덮고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의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의자 X"가 개봉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비판은 추리영화가 아니라 사랑영화라는 것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추리소설 대가의 소설이기에 그러한 평은 당연했을 것.


이 책은 천재 수학자의 논리 싸움을 그렸다기보다는,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전제가 되어 흘러간다. 그러므로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러 갔다면, 천재 수학자의 추리를 기대하기보다는 헌신적인 사랑 - 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 을 기대하고 가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392~393쪽 이 세상에는 거기에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숭고한 것이 존재한다.


<백야행>(2000, 태동출판사)에 이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두 번째 읽었는데, 두 책에서 나오는 공통적인 사랑의 방식은 모두 한 사람과 관계하는 그 자체로 행복해하는 한 남자가 사랑의 대상을 지키는 - 비록 방법이 옳지는 못하지만 - 것이다. 그리고 항상 먼발치에서 그 사람을 지켜본다. 썩 부럽진 않지만, 헌신적인 사랑을 함에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일을 하든지, 추리를 하던지, 전제가 잘 못 되면, 아무리 일을 해도 헛수고가 된다. 최근 내가 저질렀던 실수도, 전제의 오류가 있던 데이터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발생했었다. 지지난 주 금요일 완벽하게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을 하루, 이틀 만끽했었지만, 지난 월요일에 출근하고 나서 오류를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의 절망감이 들 때의 아찔함.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또한 치밀한 논리 싸움을 하면서, 전제를 비틀어, 결국 자신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논리 싸움에서는 승리했다. 결과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나.'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이 결정되고, 그 방향은 우리를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 올바른 토대 위에 집을 짓고, 우리가 응당 있어야 할 그 곳에 이를 때 까지, 끊임 없이 올바른 곳에 서 있는지 점검하자.


그나저나, 책 다 읽고 영화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이제 조만간 영화 내리겠지? 자, 이제 영화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소설속 주인공을 분했는지만 확인하면 끝!




용의자 X의 헌신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06-08-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정교한 살인수식에 도전하는 천재 물리학자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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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일상2012. 11. 5. 00:42
카톡 삭제한 지 5일 째. 카톡을 삭제한 이유는 카톡 사진이나 문구 등에 감정을 투여하여, "나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고자 하는 나에 대한 약아빠짐과 카톡에 종속되어 살아감에 따른 실망감때문이었다. 그리고 탈퇴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의 모든 이유보다 "충동적이었다."라고 설명하는 것 보다 그럴듯 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막상 카톡이 없으니 연락이 줄어든 것 같긴 하다. 연락이 오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것도 현저하게 줄었다. 그리고 - 아이폰의 경우 -항상 카톡창에 뜨던 빨간색 동그라미에 있은 숫자 또한 거의 볼 일이 없어서 허전하기도 하다. 아침 7시 반쯤에 오는 웨thㅓ뉴스도, 점심나절에 오는 야구친구 카톡도 더 이상은 없다. 애니팡의 하트도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그리고 단체 카톡창의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던 언어들의 허무한 메아리도 더 이상 없다.

카톡 삭제 후 하루이틀은 적응이 아니 되었었는데, 이제 그럭저럭 살아갈만 하다. 하지만 가끔 그 사람 - 들 - 사진이나 대화명이 바뀌지는 않았을까 궁금하여 '다시 가입해볼까?'라고 생각해보다가 침한번 꼴깍 삼키고 참아본다. 어쨌든 이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는지는 모르지만, 카톡없이 살아갈만 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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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일상2012. 11. 5. 00:41
10월이 간다. 10월의 마지막 날. 달콤한 휴일로 시작했던 10월. 하지만 어느 때 보다도 바빴던 직장생활.

그 동안 안 마시던 커피를 마셔도 잠이 잘 올 정도로 바빴다고 얘기하면, 다른 사람은 이해할 지 모르지만, 내 몸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커피를 마시면 아무리 피곤해도 누워서 1시간이상 뒤척여야 잠을 이룰 수 있었지만 10월은 예외였다.

회사에서 많이 혼나고, 내 한계를 절감하기도 하여, 매일매일 멘붕의 연속이었다. 11월이 된다고 하여도 이런 내 모습이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 입사 후 6개월 -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에 그쳤다면, 몇시간 앞두지 않은 11월에는 진짜 직장인이 되어야지.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더 나아질 게 없는 것 같은 현실 인식에 나이 듦이 두렵고 서러워질 때가 많지만, 외려 나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음에 더 감사해졌음 좋겠다. 이제 성숙이나 성장을 바라는 게 아니라, 참된 나에 대한 인식을 바란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으로 같은 곳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남자든 여자든 아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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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2. 10. 27. 23:28
오렌지색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를 차근차근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을 5-0으로 이긴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대표팀 유니폼을 접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오렌지 빛이 강함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걸 처음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 가령 옷, 신발, 시계 등 에서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오렌지 색을 띠는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맞춘 안경테도 오렌지빛이 곁들여 있는 걸 골랐다. 오렌지 빛은 뭔가 상쾌하고 상큼하다. 아마 나에게 없는 것들을 갈망했기에 이를 선호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상 나의 오렌지 - 어륀지 - 색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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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
단상2012. 10. 22. 18:53





“꽃을 꺾기 위해 덤불 속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덤불 속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 상처받는 것이므로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

조르주 상드의 사랑론(論). 사랑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은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하여 꺾어 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상이다. 꽃은 꺾으면 시든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 물론 이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야기는 사랑의 상처에 대한 메타포는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랑 - 이라고 착각 - 을 하며 상처를 받았다는 핑계를 대지 말자.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자. 물론 이 기다림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 에로스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

Posted by 데이드리머
2012. 8. 21. 22:03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라는 물음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도 ‘그거 알아서 뭐하게.’라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아마 나는 그리 대답했을 것 같다. 생각을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을 이유로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의 생각은 주체적으로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사,2009)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를 이야기 하는 책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만들어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목적 하에, 주입된 어떤 것이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교육을 이야기한다. 단순 주입식 교육은 생각을 못하게 하고,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 객관식 문제는 사고의 틀을 단순화 시킨다. 그리고 그런 시험으로 매겨전 등수는 학생들을 서열화 시키고, 서열의 상위에 위치한 학생들은 사회의 기득권층이 된다.

43쪽 인간과 사회에 관해 질문을 던질 줄 모르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이 기존 체제를 지키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비판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세계에는 지배세력이 기획, 의도하여 암기하도록 한, 세뇌시킨 것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회의하지 않고 고집하기 때문에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친 교육’의 실상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기 생각과 논리가 없어 지배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구성원을 양산하는.

 우리나라 교육은 전체주의를 강요한다. 근대적인 우리 교육은 일제의 일제의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잔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체주의는 우리의 생각을 경직시킨다. 전체를 따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곳은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 학교이다. 이는 비단 학교 뿐만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를 강요하는 곳은 모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 사회는 맘몬신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고발한다. 물질은 최고의 선이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부자되세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우리나라. 홍세화씨는 오랜 프랑스 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와, “부자되세요.” 라는 광고를 보며, 끝에 (마음의)라는 말을 끝까지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 너무 큰 기대였었다.

 이는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시스템화 해온 결과물이다. 특히, TV의 광고는 끊임 없이 소비를 강요한다. TV 광고 뿐만 아니라, 지하철 역 앞의 버스에 프린팅 된 맥주 광고, 길을 지나가다 보는 광고판을 통해서도, 그 물건을 가져야 괜찮은 사람이 될거라며 속삭인다. 이 또한 우리의 생각을 오로지 자본에게 집중시킨다. 주체적인 생각을 방해하고, 자본에 종속시킨다.

 저자는 이 외에도 언론의 폐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오랫동안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온 언론. 그러한 언론에 길들여진 우리는 그 언론이 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언론은 기득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신문 기사를 자세히 뜯어서 읽어보면, 과연 누구의 입김을 대변하고 있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기사를 활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의도한 대로 우리의 생각이 형성될 것 이다.

 그러면 우리 주위의 환경들은 끝끝내 우리의 주체적인 생각을 방해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나만의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는 물신에 맞설 수 항체를 기르고 가치관의 문제를 바로 잡는 것일 것이다. 

205쪽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유일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온랒 유령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나’와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긴장과 성찰이 요구된다.

 결국 우리 존재에 대한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존재를 둘러싼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자기 성찰은 본질에 집중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는 물질보다 더 귀한 존엄한 한 인간에 대한 성찰로 이끌고,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에 딱 떨어지는 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물음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내 생각이 어떻게 형상되었는지에 관하여 자문하는 것이 물신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 한다.

98쪽 말하자면 귀소본능이란 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라는 관계로부터 비켜나 있다고 기억되는 곳에 안기고자 함이라는 얘기다.

179쪽 성숙한 사회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의 의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강제에 의해 정착되거나 성숙될 수 없다. 구성원들이 민주적이머 주체적안 시민의식을 형성하지 못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04-205쪽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고. 그러니 이제 사람 사는 방식의 변화도 당연한 것 아니냐고.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 여행을 즐기던 사람들이 심심찮게 하는 말처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장소와 차이와 시대의 변화에도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꿈과 욕망,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그것들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위를 향유하고자 하는 본원적 욕구는 변할 수 없다. 다만 각박한 현실이 잠시 우리를 눈멀게 하고 있을 뿐이다.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유일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온랒 유령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나'와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긴장과 성찰이 요구된다.


생각의 좌표

저자
홍세화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09-11-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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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이드리머